“산소마스크 벗겨지는 순간이 바로 저승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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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소방관 김주환씨가 10일 서울 마포소방서에서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대형 사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비슷한 유형의 참사가 거듭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최정동 기자]

“수도권 공장·창고 밀집지역에서는 언제든지 제2, 제3의 이천 화재 참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25년 경력의 베테랑 소방관 김주환(54·소방경·사진)씨는 지난 7일 이천에서 발생한 냉동창고 화재의 문제점을 지적해 달라는 기자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김씨는 영등포소방서 진압팀장으로 근무하다 9일 마포소방서에 배치됐다.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유독가스의 위험성이었다. 특히 이번 이천 화재처럼 유독가스가 발생하는 곳이라면 인명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독가스실에 갇힌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숱한 화재현장에서 유독가스의 위험성을 몸소 체득한 사람이다. 1983년 소방관이 된 이래 지금까지 현장출동 경력이 3200회를 넘어선다. 2000년 서울 여의도 지하 공동구 화재 때 전선피복에서 나오는 유독가스가 가득 찬 지하현장을 200m 이상 뚫고 내려가 화재를 진압한 주인공이다. 땅밑 공동구 속 전선·통신 케이블을 따라 불이 이어지는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을 때 “지하로 직접 내려가 발화 지점을 찾아내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좁고 캄캄한 공동구를 헤매면서 아차 실수로 산소마스크가 벗겨지는 순간이 바로 저승길이라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흘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실제로 유독가스를 마신 사람은 화재현장에서 구출되더라도 생존 가능성이 극히 낮다. 김씨는 “7년 전 수도권의 한 공장에서 불길 속에 갇힌 사람을 업어서 나온 적이 있었는데 병원으로 후송되는 도중 결국 숨졌다”며 “유독가스만 마시지 않았어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천 화재 사고의 주범은 냉동창고의 벽과 바닥·천장에 뿌려진 우레탄폼과 공장 외벽의 샌드위치 패널이다. 우레탄폼은 값싸고 단열 성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냉장·냉동 창고에 단골로 이용되고 있다. 샌드위치 패널 역시 마찬가지다. 철판 사이에 스티로폼이 채워져 있어, 단열 기능이 있는 데다 공사 기간이 짧은 이점 때문에 최근 공장이나 일반 창고 건물 소재로 널리 쓰인다.

김씨는 “수도권에 산재한 냉동·냉장창고의 대부분이 우레탄폼을 사용한 건물”이라며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조립식 공장건물에는 샌드위치 패널이 주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천 지역에만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창고가 100개를 넘는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천 냉동창고 화재는 우레탄폼 공사 후 지하 실내에 남아 있던 유증기(油蒸氣)에 불꽃이 튀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마(火魔)는 남은 우레탄폼 원료와 벽면에 시공된 우레탄폼, 샌드위치 패널, LPG가스통 등으로 옮겨 붙으면서 순식간에 번져갔다. 희생자 거의 전부가 우레탄폼 등에서 나온 유독가스에 질식사했다.

김씨는 “우레탄폼이나 샌드위치 패널이 시공된 화재 현장을 자주 봤다”며 “패널 철판 속에 있는 스티로폼에 불이 붙으면 다 탈 때까지 불을 끌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런 건물에 불이 나면서 발생하는 가스는 한 모금만 마셔도 치명적인 내상을 입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1999년 어린이 19명을 포함해 23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성 씨랜드 화재와 사망 55명, 중경상 79명의 큰 피해를 낳은 인천 라이프 호프집 화재 역시 우레탄폼 등에서 나온 유독가스가 사망의 주원인이었다. 씨랜드 화재는 컨테이너 건물 내부 단열재가 타면서 나온 유독가스 때문에 인명피해가 더 컸다. 호프집 사망자 역시 같은 건물 지하 1층 노래방의 우레탄폼 장식이 불에 타면서 나온 유독가스가 계단을 타고 위층까지 올라오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이후 관련법이 개정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다중이용시설’에는 우레탄폼을 비롯해 불에 잘 타는 석유화학제품 사용이 금지됐다.

인터뷰 도중 김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장이나 창고 등에는 지금도 아무런 제재 없이 우레탄폼과 스티로폼 소재가 사용되고 있어요. 건물 안에 소화기와 스프링클러 등만 갖추면 그만이지요. 앞으로는 공장건물을 지을 때 불에 잘 안타는 단열소재를 쓰도록 하는 강제 규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레탄폼이나 스티로폼은 단열 성능이 뛰어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불에 잘 탈 뿐 아니라 일단 불이 붙으면 일산화탄소와 시안가스, 포스겐가스, 황화수소, 염화수소 등 20여 종의 유독가스를 내뿜는다.

이중 포스겐가스는 조금만 마셔도 인체에 치명적인 독가스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군을 공격할 때 쓴 독가스가 바로 포스겐이다. 1차 대전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은 서로 독가스 공격을 주고받다 무려 97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시안가스 역시 맹독성이다. 경기도 소방재난본부 조사 결과 우레탄 100g을 화재 때 평균온도인 600도로 가열했을 때 시안가스 420ppm이 발생한다. 이 정도 농도면 가스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 한 보통 5분 이내에 의식을 잃거나 사망한다는 게 소방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10년 전 부산 암남동 냉동 창고 화재 당시에도 우레탄폼이 타면서 나온 유독가스 때문에 27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각종 유독가스에 계속 노출되는 소방관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김씨는 “20여 년 전 초년병 시절에는 변변한 마스크 하나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하고 화재를 진압했다”며 “이 때문에 퇴직한 선배 소방관들이 2~3년 뒤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숨지는 일이 허다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산소탱크와 마스크 등 보호장구를 제대로 착용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크게 줄었다”고 덧붙였다.

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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