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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으로 유혹하는 魔性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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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 14면

마리아 칼라스(1923~77)가 영화에 직접 출연한 유일한 작품은 파솔리니 감독의 ‘메데아’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쓴 그리스 비극을 각색한 작품으로 칼라스는 오리엔트 지방의 여인 메데아로 나온다. 그녀는 적국인 그리스의 영웅 이아손을 만나 사랑에 빠진 뒤, 남자를 따라 조국을 버리고 그리스로 이주한다. 그러나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지만 메데아는 배신당하고, 복수심에 불탄 그녀는 잔인하게도 두 아들을 죽인다. 메데아는 사랑을 위해 조국까지 버렸는데, 애꿎게도 그 사랑으로부터 배신당한 것이다. 이 영화가 발표된 때는 1969년으로, 바로 1년 전에 칼라스는 메데아처럼 오나시스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그리스의 선박왕은 칼라스와 10여 년 이상 연인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새로운 신부로 재클린 케네디를 선택했던 것이다. 여신처럼 오만했던 칼라스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고,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친구였던 파솔리니가 사랑의 상처 때문에 숨어 있던 칼라스를 스크린으로 불러냈다. 파솔리니는 ‘메데아’를 대단히 시적인 기법으로 표현했다. 대사로 일일이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상징적인 화면으로 커다란 이미지를 그렸다.

영화에서 칼라스는 단 한 번도 대사를 하지 않는다. 물론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 침묵한 칼라스의 모습은 동방의 신비스러운 여성을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메데아’는 칼라스가 노래를 부르지 않아 오페라 관객에게는 약간의 실망을, 영화 관객에게는 신선한 경험을 제공한 실험작으로 남아 있다. ‘칼라스 포에버’는 미리 밝혀두지만 칼라스의 전기영화가 아니다. 제피렐리 감독이 상상으로 그린 칼라스의 생전 마지막 석 달간의 모습이다. 트뤼포 영화의 여배우로 유명한 파니 아르당이 칼라스 역을 맡았다. 칼라스는 비록 오나시스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그를 평생의 연인으로 가슴에 담고 살았다.

그런 그가 1975년 죽자 칼라스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고, 오나시스와의 기억이 남아 있는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그러고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녀도 2년 뒤 (그를 따라)죽었는데, 비밀로 남아 있던 파리의 은둔 시절, 특히 죽기 전 석 달의 생활이 제피렐리의 상상에 의해 스크린 위에 그려지는 것이다.

제피렐리는 칼라스를 세 종류의 캐릭터로 해석한다. 노르마, 나비부인, 그리고 카르멘이다. 모두 칼라스가 절정의 노래 실력을 보여준 오페라 레퍼토리이자 주인공의 이름이다. 제피렐리가 해석한 파리에서의 칼라스는 ‘나비부인’이다. 그녀와 함께 사는 하녀의 말에 따르면, 칼라스는 밤마다 자기 레코드를 들으며 운다는 것이다. 공연기획자인 래리(제러미 아이언스)가 문밖에서 숨어서 보니, 유령처럼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칼라스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그녀는 ‘나비부인’의 유명한 아리아인 ‘어떤 갠 날’을 듣고 있다. 나비부인이 돌아오지 않는 미국인 남편을 그리워하며, 어떤 갠 날 반드시 그가 돌아오리라는 염원을 노래하는 부분이다. 남편은 돌아올 가망이 거의 없는데, 나비부인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래서 남자의 귀환을 소원하며 절규하듯 노래 부른다. 이 노래는 이미 죽은 오나시스를 향한 칼라스의 불가능한 연가(戀歌)나 다름없다. 자신을 버리고 오나시스는 떠났지만 칼라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어서라도 그와의 재결합을 염원하는 것이다.

제피렐리는 이 장면을 아주 복합적으로 찍었다. 방에서는 칼라스가 미친 듯 아리아를 부르고 있고, 문밖에선 또 다른 나비부인을 연기했던 제러미 아이언스가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언스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M. 버터플라이’(1993)에서 ‘남성’ 나비부인을 인상 깊게 연기한 바 있다. 그러니 버림받은 사람의 고통이 배가되어 전달되는데, 나비부인이 울고 있고 또 다른 나비부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제피렐리는 우리에게 올리비아 핫세가 주연한 ‘로미오와 줄리엣’(1968)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 감독인데, 그는 칼라스의 평생 친구였다. 두 사람의 우정은 195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피렐리는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조감독이었다. 비스콘티 감독은 영화뿐 아니라 오페라 연출가로도 유명한 인물인데, 제피렐리는 스승을 따라 영화제작 현장으로, 또 오페라 무대로 활동영역을 넓혀가며 자기의 경력을 쌓고 있었다.

칼라스에게서 마녀(魔女)의 캐릭터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비스콘티 감독이다. 순결하고 애절한 캐릭터가 태반인 다른 소프라노들과 달리 칼라스에게 비스콘티가 주문한 것은 때에 따라 공포감도 줄 수 있는 숭고한 소프라노였다. 약간 두터운 목소리를 갖고 있던 그녀는 비스콘티의 주문을 기대 이상으로 소화했다.

1955년 비스콘티가 연출을 맡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지휘한 라 스칼라 극장의 ‘라 트라비아타’ 공연은 지금도 최고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때부터 비스콘티와 칼라스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강한 성격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자주 충돌했던 것이다. 칼라스가 비스콘티 대신 선택한 연출가가 바로 그의 조감독이었던 부드러운 성격의 미남 청년 제피렐리였다.

영화 속에서 제피렐리의 분신으로 나오는 인물이 제러미 아이언스가 연기한 래리다. 그는 공연기획자인데, 제피렐리처럼 동성애자다. 이렇게 영화는 칼라스에 대한 상상이자 또 감독 자신에 대한 회고까지 포함하고 있다.

칼라스와 제피렐리는 동갑이다. 70세가 넘은 노감독은 칼라스와의 상상의 만남을 그리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우리 관객에게 좀 불편한 점은 제피렐리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낸 점일 것 같다. 래리는 제피렐리처럼 거리낌 없이 젊은 남자 애인과 달콤한 사랑을 나눈다.

래리의 계획은 당시 새로 발견된 기술인 립싱크를 이용하여 오페라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칼라스가 주연이다. 외모는 현재의 모습이지만 목소리는 전성기 때의 녹음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영화제작의 첫 레퍼토리는 ‘카르멘’이다. 칼라스가 녹음만 했지, 무대 위에서 연기는 하지 않은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 영화가 만들어지는 장면, 곧 카르멘을 만드는 장면은 오페라 연출가 제피렐리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는 대목이다.

칼라스는 특히 ‘카르멘’ 녹음을 잘했다. 파리오페라의 조르주 프레트르가 지휘하고 니콜라이 게다(테너)와 협연한 앨범이다. 담배공장의 처녀 카르멘이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돈 호세를 유혹하기 위해 부르는 ‘하바네라’는 칼라스의 목소리 연기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사이렌의 유혹적인 목소리도 아마 이보다 더 위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혹하고 위협하고 매달리고 매몰차다. 이 모든 감정을 하나의 노래 속에 다 불어넣는다. 칼라스 역을 맡은 파니 아르당의 연기도 일품이다.

립싱크는 거의 완벽하여 마치 칼라스가 다시 살아나 노래 부르는 듯하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집시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제피렐리의 솜씨는 그가 여전히 오페라 연출의 대가 대접을 받는 이유를 알게 한다. 마치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을 보는 듯 무대는 고풍스럽고 화려하다. ‘카르멘’을 다시 만들어 가는 이 부분이 영화의 압권이다.

‘나비부인’에서는 배신당한 불쌍한 여자가 자살하더니, ‘카르멘’에선 배신을 한 못된 여자가 살해된다. 어떤 게 진짜 칼라스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무대에서는 못된 여자가 칼라스에게 더 맞았다. 그녀는 마녀·악녀 같은 강한 성격의 소프라노를 연기하는 데 발군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칼라스는 불쌍한 여자였던 것 같다. 가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는 칼라스는 미국에서 차별받는 그리스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고, 주무대인 이탈리아에서도 강렬한 질투의 대상이었다. 오만한 그녀는 이탈리아의 대표 소프라노인 레나타 테발디를 언제나 한 뼘쯤 앞질렀다.

그런 그가 공개적으로 오나시스에게 버림을 받았으니 많은 사람은 동정심을 가졌지만 고소함도 느꼈을지 모른다. 결국 그 상처가 그녀의 노래에 대한 열정을 빼앗아 갔다. 칼라스는 불과 53세에 죽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노르마’의 아리아 ‘카스타 디바’로 장식돼 있다. 역시 버림받은 여성이 사랑을 되찾기를 염원하는 노래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칼라스의 연가는 교회의 찬가처럼 성스럽게 들린다. ‘카스타 디바’가 들리는 가운데 칼라스가 파리 시내의 ‘저쪽’으로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칼라스의 기도가 저승에서는 이뤄졌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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