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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시간, 총독의 시간, 그리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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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 22면

1896년은 너무 빠르게 닥쳐왔다. 을씨년스러운 봉건왕조의 끝자락을 횡단하면서 그해 정월 초하루는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이 꺾인 이듬해이고 왕비가 왜인에게 난자당해 죽은 직후 그 겨울은 결코 ‘을미적을미적’ 오지 않았다. ‘을미적을미적’이란 동학도들이 갑오년에 실패하면 을미년에 꾸물거리다 병신년에 병신이 되고 말리라는 참요(讖謠)에 나온다. 시간에 동작과 속도를 결합한 가락이다.

일상의 사회사 <2> 시간연대기

역사는 을미적거렸지만 새해는 11월 17일에 단절적으로 등장했다. 양력(陽曆)의 시작이었다. 을미년(乙未年)은 11월 17일부터 12월 사이가 아예 통째로 역사에서도 시간에서도 사라졌다. 왕은 제왕의 시간인 늙은 연호를 새해에 맞춰 건양(建陽)이라 이름하여 발표했다. 그렇다고 낡은 시간 기둥이 기울어가는 새 제국을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한반도에서 근대적 시간은 그렇게 가파른 운명으로 찾아왔다.

근대적 시간은 서양시간, 기독의 시간, 자본의 시간, 기계와 산업의 시간, 무엇보다 식민의 시간으로 한국인의 삶 전체를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다. 그 시간은 순환적 농경시간에 오금을 박으면서 대지와 사람 관계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규정해 나갔다.

이전까지 시간이 순환적이라고 해서 태평성대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건 대다수가 농토에 밀착해 있던 백성에게 오래도록 시간을 숙명화했지 자각된 시간으로 발전을 모색한 적이 거의 없었다. 가령 태양 움직임에 따른 한 해의 24등분(절기)은 봉건사회에서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국가 차원에서 장려한 순환력(循環曆)이었다. 백성은 순환력 안에 순종하여 갇혀 있었다. 덧붙이자면 백성의 시간은 ‘을미적대다 병신’이 된 채 새 시간 창조를 꿈꾸고 있었다.

일상에서 근대적 시간은 1899년 경인철도에서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한국인의 중심을 관통해갔다. 그건 동시에 시간침략의 선언이기도 했다. 기차는 엄정한 시간관리 아래 움직였고, 최초로 문명화된 시간이 판매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역마다 건물 이마에 시간기계가 들어가 박혔다. 관청에도 시계가 중심에 들어섰다. 시간 지키기는 명령이 되었다. 일제는 시간규율을 통해 한국인을 길들여 나갔다. 식민지 시간은 문명의 얼굴로 노동과 삶을 틀어쥐었다. 참고로 영국철도에서 비롯된 그리니치 시간(GMT)은 제국의 공간을 시간으로 물리화했다.

양력 도입 이후 한국인에게 가장 비극적 시간언어가 등장한 건 1905년이었다. 그 가을 을사늑탈로 조선왕조는 실질적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놀랍게도 양력을 도입한 지 10년에서 하루도 어김없는 11월 17일이었다. 10년 전 그날이 휘발해 버리면서 벌써 역사의 암전을 암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은 그 일을 잊지 않고자 이윽고 날씨가 스산하고 쓸쓸하면 “을사년(乙巳年)스럽다”, 곧 “을씨년스럽다”고 했다.

약탈당한 시간을 생체적 감수성으로 바꿔내고 얻은 슬픈 시간언어는 이렇게 태어났다.
식민지 시간은 이처럼 운명을 삼키면서 덮쳐왔다. 역과 관청을 거쳐 식민지 시간은 학교· 군대·감옥을 장악해 들어갔다. 관영 평양광업소(1910)에서는 시간관리가 노동통제로 이어지면서 생산이 집약적으로 강화되었다.

통감부 오포(1908)는 하루에 두 번 왕국의 존재와 위엄을 알리던 인경과 파루 종소리를 밀어내고 서울 남산에서 한반도 전체의 시간을 고지했다. 탄두를 빼고 쏘는 오포(noon day gun)는 1843년 아편전쟁에서 이긴 영국군이 홍콩에서 오정(午正)마다 쏘면서 비롯되었다. 오포는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대지와 사람을 지배한다는 화약내 나는 오만에 찬 파열적 괴성이었다. 그건 사이렌으로 바뀌어 1970년대까지 소방서의 올연한 망루 끝에서 자지러지곤 했다. 배가 고파 우는 아이 울음소리를 “오포 분다”고 빗댄 말도 여기서 나왔다.

제왕의 시간이 총독의 시간으로 넘어간 모욕적 오포 소리 속에 한반도의 시간은 완전히 일제 수중에 떨어졌다. 그 무렵 한국문학사에 빛나는 근대 계몽작가 상당수는 식민의 시간을 거부감 없이 문명의 시간으로 받아들여 고스란히 반영했다.

문학작품에 숱하게 등장하는, 자명종 달린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는 얼핏 시간을 개인화하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지만 정작 시간엄수와 시간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개별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간그물과 그에 따른 사회구도에 복무하겠다는 걸 팔목에 사슬로 걸고 약조하는 일이었다. 식민지 산업체계에 적응해야 하는 농경민에게 시간은 금이 아니라 회초리였다. 7요일제는 총독부의 권장과 기독교 세력 확장과 궤를 같이하면서 정착해갔다.

시간지배방향은 해방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가는 1년 52주를 ‘○○주간’으로 설정하고, 국경일과 기념일을 빈틈없이 배치해왔다. 이는 동일한 의식적(儀式的) 시간 부여를 통해 국민을 국가와 정권의 아이덴티티로 묶어내는 일이었다. 이러한 국민국가의 시간개념은 일제가 남긴 유산이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빼앗긴 표준시(동경 125.5도)를 되찾아왔으나 5·16쿠데타 직후 다시 고베 서쪽을 지나는 135도로 바뀌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미군에게 시간을 맞춘, 생활이 아니라 작전이 시간 중심으로 들어와버린 일이었다. 그에 따라 한국인에게 아침은 30분 일찍 찾아온다.

시간선택과 시간소비 감각이 어느 정도 자리 잡히면서 이제 시간은 상품 자체가 되었다. ‘시즌’이 등장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넘어 발렌타인데이, 빼빼로데이 등 한 해에 300일 가까운 오늘날 ‘데이마케팅’은 시간시장의 그물이 얼마나 넓고 큰가를 말해주고 있다. 휴가 또한 휴식공간 등 소비내용에서 시장의 포섭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밀레니엄버그’는 그 극치를 보여준다. 기계(컴퓨터)에 종속된 문명인의 시간을 웅변하고 있는 이 일은 전형적인 시간판매이자 시간사기 사건이었다. 기업과 개인은 다투어 전산시스템과 컴퓨터를 바꾸어야 했다.

그건 거의 서력기원 자체의 오류(Jesus’s bug)로 보일 지경이었다. 마침내 2000년 첫날 0시가 되었을 때는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1년을 앞당겨 선언한 새로운 밀레니엄 잔치라는 시간상품이 지구를 뒤덮고 있었다.

사진 권혁재 전문기자, 사진 촬영 협조 ANTIQUE WATCH 龍睛

물질문명이 급속하게 삶의 중심에 자리 잡은 20세기를 일상을 중심으로 되짚어볼 서해성씨는 소설가이자 이주노동자 가족을 위한 문화인권 프로그램 ‘아시아스타트’ 위원장으로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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