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북녘동포>6.在蘇임업 열풍 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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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재소(在蘇)임업 갔다오면 한몫 잡는다.』 70년대 후반부터북한사회에「재소임업」바람이 불었다.재소임업은 한겨울 영하 30~40도의 설원(雪原)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다.한국에서 60년대 서독 광부,70년대 월남및 중동러시가 일었다.북한에서도 노동력 수출의 열풍이 분 것이다.상시 2만여명 수준.
평북염주군 철도사로청위원장 장기홍(張起洪.33)씨는『젊은이들거의가 재소임업을 가려고 한다』고 분위기를 설명한다.외국에 나갈 수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고 신기해서다.그러나 그 보다는 『한번 갔다오면 북한에서 평생 벌어도 갖기 힘든 물건을 가져올수 있기에 재소임업은 남자들의 우상이 되고 있다』(장기홍씨)는것.때문에 당간부들은 물론이고 인기직종의 벤츠차 운전기사.의사등 직업과 관계없이 돈을 벌려고 시베리아행 열차에 올랐다(여만철.김남준씨).
당국으로서도 재소임업은 외화획득의 원천으로 중요성을 갖는다.
탄광.광산의 받침목,철도침목,건설용 통나무 등 아쉬운 원자재도획득할 수 있다.
노동력 수출선도 다양하다.리비아.이라크등 중동행은 러시아보다노동여건이 낫고 보수가 재소임업보다 3~4배 높아 최고인기다.
중국의 콩농사와 캐나다의 벌목사업에 인력을 송출했거나,할 계획이어서 해외노무송출은 계속 확대될 전망이다.
여만철씨의 증언-.
『93년 5월에는 독일의 가스관 공사에 노동자들이 나갔는데 당시 경쟁이 치열했다.요즘에는 노무수출을 할때 평양시 출신 70%,나머지 30%로 하며 내가 살던 함흥이 10%를 차지한다고 들었다.』 두차례 재소임업을 갔던 정진만씨는『재소임업 갔다온 사람들은 정치적 발언만 하지 않으면 소련에서 있었던 일을 어느 정도 떠들고 다녀도 문제삼지 않았다』며『물론 아주 친한 사람에게만 은밀히 자본주의 나라들의 발전상 등을 얘기한다』고 말했다. ▲선망의 재소임업=재소임업출신 정진만(47).이철규(39.가명).엄만규(38)씨는『재소 노동자들은 텔레비전.카세트녹음기.재봉틀에서부터 치약.칫솔.비누.식량.설탕등 능력껏 꾸려온다.일부만 팔아도 수십배의 이문을 남긴다.한번 재소 갔 다오면 그 집은 형편이 풀린다』고 이구동성이다.
88~91년 재소임업을 한 장기홍씨의 체험담-.
『벌목공들은 월 1백50루블 안팎의 노임을 받아 식비.문화비.위생비등으로 45~50루블을 공제하면 1백루블 정도를 손에 쥔다.이 돈은 88~91년의 경우 미화로 7달러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대체로 노동자 1인이 3년 근무기간중 1천5백~2천 루블 정도의 목돈을 만진다.이 돈으로 14인치 흑백 텔레비전(1백50루블).냉장고(4백50루블).카세트 녹음기(2백루블).
재봉틀(1백50~2백루블)등을 장만해 귀국한다.국내에서 팔면 30~40배 장사는 거뜬하다.
요령좋은 일부 노동자들은 벌목장을 벗어나 사업을 해서 오토바이.냉장고.롤렉스 시계등 값비싼 물품을 반입,일약 졸부가 된다.오토바이나 냉장고는 대개 화교들에게 넘긴다.』 직종별로 노임이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당비서.지배인.안전원.기사장등 간부들은 훨씬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있다.노동자들은 간부들만 살찌우는 재소임업이라 하여「간부재소」라는 말을 쓴다는게 모든 벌목공에게서 확인된다.
노동자들은 본인이 원하면 대체로 월 5~7달러 안팎을 가족에게 송금할 수 있다.5달러라 해도 북한에선 바꾼돈표 12원에 해당된다.이 돈을 북한 주민들이 사용하는 돈과 40~50배가 되는 암시세로 바꾸면 5백원은 된다(90년대).
노임은『70년대말에서 87년까지 노동자들에게 월급의 2%만 루블화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내부 돈표를 주었다』(이철규.정진만씨)는 것.
『70년대 말에는 노임중 2%를 루블화로 받았다.이를 모아 소련의 전자제품 등을 사 북한으로 가져가면 최고 60배까지 이익을 남겼다.』(이철규씨) 88년 이후 1백% 그대로 월급을 주어 처분을 자유의사에 맡겼다(엄만규씨).
또 노동자들 상당수가 고향의 가족에게 물품예매권을 보낸다.가족들은 시.군마다 있는 임업부산하 재소물자공급소에 가서 표시금액에 상당한 물건을 구입하는 방식이다.이것이 가족에게 큰 혜택이 된다.가족들은 대체로 이 물건을 비싼 가격으로 되판다.
재소임업공급소의 장난이 심해 벌목공 가족들이 애를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는게 귀순자들의 증언이다.벌목공이 북한에 보낸 예매액수와 가족들에게 전달된 액수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또 국내물자공급소에서도 배경이 없거나 뇌물을 바치지 않 으면 물자인도를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다.
엄만규씨의 증언-.
『가족들이 공급소에 가 예매표를 들이밀어도「아직 물자가 도착하지 않았다」며 늑장부리기 일쑤고 어떤 곳은 물건을 넘겨주면서벌목공 부인에게 엉뚱한 수작을 벌이기도 한다.
평성공급소 소장이 벌목공아내를 25명이나 건드렸다는 소문이 벌목장에 퍼져 벌집쑤셔놓은 것같은 적도 있다.벌목공들은「귀국하면 공급소 놈들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벼른다.북한에 휴가간 벌목공들이 실제로 공급소 직원을 보복 폭행한 일도 있었다.』 재소임업 노동자들이 모두 돈을 잘 벌어오는 것은 아니다.정진만씨의 지적대로 소련에 가서 돈을 못버는 것은 물론 병신되거나 한줌의 재로 돌아오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누구나 재소임업의 기회를 잡으려고 안달인 것만은 사실이다.
***공급소 非理온상 한편 80년부터 시작된 리비아 노동은 3년간의 근무후 상당량의 물품과 미화 3백~4백달러를 가져올 수 있어 평양거주민들의 독차지가 되고 있다는 것(안혁씨).
▲선발과정과 뇌물수수=재소임업 선발과정은 복잡하다.파견대상이되려면 공장.기업소의 추천을 비롯,시.군당,시행정위원회 노동과,도행정위원회 노동처등 여러단계를 거쳐야 한다.서류검토와 면담에서 한차례라도 문제가 되면 다음을 진행할 수 없다.때문에 간부추천같은 뒷 배경이 필요하고 뇌물이 성행한다.뒷 배경에서 밀리고 뇌물을 감당하지 못하면 재소임업 나갈 생각을 아예 말라는상황이다.
뇌물은 술.담배.쌀.옷감을 요구하는 경우부터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양하다고 귀순자들은 밝힌다.최종선발과정에서 4대1의 경쟁률을 뚫었던 장기홍씨는『간부들은 특정인을 추천하고 6개월후 냉장고 1대를 보내라는 조건을 단다』고 말했다.1천원정도의 뇌물을 요로에 뿌렸다는 증언도 있다.드물게는 바꾼돈표(외화를 환전한 돈)를 주기도 하는데 위력이 가장 크다는 것.돈벌기 위해 돈쓰는 것부터 배우는 현장이다.
정진만씨의 증언-.
『나는 84년 5월 시베리아 벌목장에 갈 수속을 밟았다.84년 남포시 행정위원회 구역 노동과에 신청할 때 보니 집안토대가좋은 사람들이 서로 시베리아로 가려고 기를 쓰는 분위기였다.소속 회사(남포시 해운사업소)의 추천서를 받는 첫 단계부터 자전거뇌물을 바쳐야 했다.』 엄만규씨의 증언-.
『재소임업 노동자로 나가려면 정보.연줄.뇌물이 맞아 떨어져야한다. 나는 함북도당 간부과에 있던 친형의 처남에게서 재소노동자를 모집한다는 정보를 들었다.그가 힘써 시베리아로 갈 수 있었다.그후 재소선발 권한을 가진 김책제철소 대보수사업소의 당조직비서가 나를 심히 힐책했다.뇌물챙기기가 틀어졌기 때문 이다.
』 ▲벌목공들의 성분교체=80년대중반 이후의 벌목공들은 범죄자이거나 성분불량 계층이 아니다.
이철규.장기홍씨의 증언-.
『62년께부터 시작된 재소임업초기에는 분명히 당국이 판단할 때 죽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들,토대가 나쁜 사람들,교화소 출소자들을 내보냈다.7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성분 나쁜 사람들을 보냈다. 정부는 70년대 후반부터 재소임업에 성분 좋은 사람들로 교체하기 시작했다.노동교화입장에서 시베리아로 보낸 성분불량자들이 사고를 자주내 러시아인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었고, 또 탈출자들이 잦게 발생했다.이런 이유로 선발정책이 급선회했 다.
***국경선 賣春성행 또 초기엔 강제노역 형태여서 월급도 없었다.그러다가 70년대 초반부터 일정액의 월급이 지급되자 교화간 사람들이 돈벌어 오는 사태가 됐다.일반의 인식이 달라져 지원자가 늘어났다.』 83년부터는 국가보위부가 관여해 힘없고 배경없는 사람들은「재소」가기가 한결 힘들어졌으며 80년대 중반이후는 평양거주자와 양강.자강도의 임산일꾼이 주로 선발됐다.
『성분자 교체는 단번에 2만여명을 바꿀 수 없어 초기에는 성분분량자 1백명당 당원 20명 쯤으로 배합하는 형식이었다.84년에 한 사업소 1천여명 중 20~30명이 죄수들이었다.80년대 말까지 성분불량자는 대부분 교체됐다.』(정진만씨) ▲두만강초대소의 애환=함북선봉군(舊웅기)두만강노동자구에 두만강초대소가있다.두만강역 주변으로 강을 건너면 바로 러시아땅 핫산이다.
귀순자들은 그곳을 거의 무법천지 같았다고 말한다.재소임업에 가는 노동자,귀환노동자에게 돈푼이나 물건을 얻으려는 별의별 장사꾼과 사기꾼.「여자들」이 숨쉬는 현장이다.
그 분위기를 정진만씨는 이렇게 전한다.
『두만강초대소에서 열흘정도 묵었다.초대소에는 건물이 2개인데나가는 사람과 돌아온 사람이 뒤엉켜 수라장이 된다.이곳에선 안전원도 설치다가는 얻어맞는다.
이곳의 여자들은 재소임업 노동자들에게 물건 하나라도 더 빼앗기 위해 난리다.「재소」가는 사람들은 그래도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어서 친지들이 준 비상용 시계나 귀중품을 휴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두만강 사람들은 재소임업 귀환자들이 열차로 나오면 「종부(씨받이)소」가 나온다고 수군대며 킬킬거린다.』 엄만규씨는 『초대소에선 유리양말(스타킹),분거울만 줘도 여자가 몸을 허락한다는얘기도 나돈다』고 돈벌이에 휩쓸리는 분위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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