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터’는 분명한 박수근 작품 “아버지만의 소박미 가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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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빨래터 작품들은 부정적인 삶의 치욕에서 벗어나 밝고 뚜렷한 핑크빛 삶을 찾아 선하게 애쓰는 서민의 삶을 그린 것이다.”

고 박수근 화백의 장남 성남(61)씨가 11일 본지에 ‘박수근 위작 논란을 접하며’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그는 “이산과 죽음을 넘어 아픔을 빨아야 하는 것이 빨래터 모습이었고, 이번에 문제가 된 작품을 그 중에서도 가장 밝고 선명하게 그린 진솔한 작품”이라고 썼다. 성남씨는 1986년 호주로 이민갔지만 이중섭·박수근 대규모 위작 사건이 터진 2005년 귀국해 경기도 파주 컨테이너 박스를 작업실 겸 생활공간으로 지내고 있다.

9일 2차 감정을 마친 뒤 그는 “아버지 그림이 열 정거장이라면 이건 네 정거장 정도에 온 그림”이라며 “바늘로 그림을 살짝 긁어보니 유화 물감이 완전히 말라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의 소리로 오래된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오랜 기간 이 그림을 소장해 온 미국인 존 릭(81)씨와 이날 전화통화한 내용을 공개하며 “한국인이 아무도 아버지 그림을 알아주지 않을 때 릭씨는 이를 알아보고 아버지를 후원하며 작품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그는 특히 “아버지 그림이 수십억원씩 낙찰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작품 세계에 대한 전반적 재평가, 가짜가 발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박씨의 글 전문.

권근영 기자


‘빨래터’는 분명한 박수근 작품
“아버지만의 소박미 가득”

작가는 작가의 정신과 작가의 눈을 작품에 입힌다. 그것은 시대의 정신과 시대의 눈높이이기도 하고, 당시의 생활양식과 우리 모두가 겪었던 환경과 여건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과거의 이 모든 양식을 입체적인 시각으로 읽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 6·25 이후 우울한 시대에 생활의 옷가지를 빠는 우리의 모습은 안정되기 이전 불안한 모습이었다. 이산과 죽음을 넘어 아픔을 빨아야 하는 빨래터 모습이던가? 작가는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그리고 소박하게 같은 소재로 여러 작품을 그리고 또 그렸다. 여러 작품들이 조금씩 상이해 보이지만 크게 다른 것은 없다.

빨래터 작품들은 불안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삶의 투혼을 그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정적인 삶의 치욕에서 벗어나 밝고 뚜렷한 핑크빛 삶을 찾아 긍정하며 선하게 애쓰는 서민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작품은 그 중에서도 가장 밝고 선명하게 그린 진솔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진위의 기준은 그 누구와 나의 눈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박수근 작품이라면 그 작품이 박수근을 대변하며 이야기한다. 만약 어떤 작품이 위작이라면 작품 그 자체가 위작이라고, 진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작품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분명 박수근 작품이다.

민족의 울분과 전쟁으로 인해 우울에 찌든 때를 벗겨내는 풍경, 분명 다시 빨래터다. 도안하듯이, 제도하듯이, 석고 데생하듯이 보면 서툴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나의 기억에 한치도 서툴지 않은 방식으로 민족의 울분과 정신을 정겹고 따뜻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느낌은 박수근이 평생 껴안았던 정체성이며 박수근이 갖고 있는 독특한 소박미의 절정이라고 아들로서 공감하고 인정한다.

이번 사건으로 네거티브 문화가 종식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를 통해 아버지 예술과 생애를 사랑하는 애호가와 애장가들 사이에 바른 공감대가 형성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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