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형은 못 구했지만 … 한국 여성 살린 우즈벡 ‘의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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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출신 카이룰루. [경향신문 제공]

 이천 냉동창고 화재 현장에서 외국인 근로자가 40대 한국 여성의 목숨을 구해내 훈훈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주인공은 화재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우즈베키스탄 출신 배관공 벡투르소노프 카이룰루(33). 배관설비업체 D사 소속 일용직 근로자인 카이룰루는 사고 직전 지하 냉동창고 중앙 통로 부근에서 배관작업을 하던 중 천둥 같은 폭발음을 들었다.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그는 같은 우즈베키스탄 출신 친구의 통역을 거쳐 “폭발음이 나고 순식간에 큰 불길이 냉동창고를 덮쳤다.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그는 폭발 직후 근처에 있던 한 한국인 아주머니에게 ‘빨리 피하라’고 소리친 뒤 자신도 머리 위로 덮쳐오는 불길을 피해 출입구 쪽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이 여성이 불길에 휩싸인 채 넘어지는 모습이 카이룰루의 눈에 띄었다. 카이룰루는 “차마 혼자만 대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작업복 외투를 벗어 불을 끈 뒤 이 여성을 등에 업고 건물 밖으로 빠져 나왔다.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불길이 창고를 삼켜버린 뒤였다.

 그러나 카이룰루는 그제야 창고 안에서 함께 일하던 사촌형 누랄리(41)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게 됐다. 다급한 상황에서 한국인 여성은 구해냈지만 정작 자신의 사촌형은 신경 쓰지 못한 것이다. 카이룰루는 형을 구하기 위해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주변에서 가로막아 포기해야 했다. 결국 사촌형은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카이룰루는 “형이 큰딸 결혼에 맞춰 5월께 귀국할 예정이었는데 자식 결혼도 못 보고 눈을 감았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고의 충격에다 형을 잃은 슬픔과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결국 그는 이천에 있는 자신의 숙소에 몸져눕고 말았다. 카이룰루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소식을 전했는데 당장 오시지 못해 난리가 났다”며 “마음이 괴로워 하루 종일 아무 일도 못하고 누워 지낸다”고 말했다.

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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