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과주말을] 유머 쌓고 올라가는 ‘세계 최고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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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럼두들 등반기
W.E 보우먼 지음, 김훈 옮김, 마운틴북스, 244쪽, 9500원

해발 1만2000 미터짜리 세계 최고봉‘럼두들’ 등반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초자연 앞에서 무력해지는 인간의 도전, 자신과의 싸움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동네 뒷산깨나 탔다는 허술한 산악인들이 모여 럼두들이란 가상의 최고봉을 오르는 과정을 그린 코믹 소설이니까.
 
가령 이런 식이다. 짐을 옮기는 데 포터 다섯 명, 그 다섯 포터가 먹을 식량을 나를 포터 한 명, 그 한 명이 먹을 식량을 질 소년 하나가 필요하단다. 단, 소년은 자신의 식량을 스스로 지고가야 한단다. 게다가 그들이 쓸 2주치 물자를 나르는 데 다시 포터 여덟 명과 소년 하나가 필요해 이래저래 총 3000명의 포터와 375명의 소년을 동원해야 한다나. 아무리 등반 지식이 없어도 3000 궁녀를 연상시키는 어마어마한 숫자 앞에선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참고로 1977년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한국원정대는 포터 600명을 고용했다).

 영어의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라면 원문으로 읽는 게 낫겠다 싶은 언어 유희들도 가득하다.

우리식으로 응용하자면 ‘희생양떼는 초원에서 한가로이 쌍방울꽃과 뷰티풀을 뜯어먹고, 개울에는 아이디어떼가 노닐고 있었다’와 같은 유머가 수시로 나온다.

모든 걸 선의로 해석하는 어리숙한 등반대장, 늘 길을 잃어버리는 길잡이, 온갖 병을 달고 사느라 자기 병 치료에만 급급한 의사, 통역을 잘못해 매번 곤경에 처하는 언어 전문가 등 모자란 캐릭터들도 재미있다. 걸핏하면 포터들의 짐짝에 얹혀 산을 오르는 주인공들이지만 결국 럼두들을 얼렁뚱땅 정복하긴 한다. 믿거나 말거나.
 
『럼두들 등반기』는 1956년 발간됐지만 언론의 별다른 주목을 못 받고 30년 가까이 절판됐던 책이다.

그런데도 산악인들 사이에선 전설처럼 전해 내려왔단다. 이 책을 사랑한 남극원정대 대원들 때문에 남극 지도에 ‘럼두들’이란 지명이 들어갔고, 에베레스트가 있는 네팔의 카트만두 시에는 ‘럼두들’이란 식당이 성업중이란다. 유머로 쌓은 산 ‘럼두들’이 반세기가 넘도록 살아있는 셈이다. 산을 사랑하거나, 근엄한 에베레스트 등정기에 넌더리난 적 있다면 재미 삼아 읽어볼 만하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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