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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중앙문예희곡당선작>中.기차를 타고건넌 둥지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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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민효:(타자를 치며 또박또박 읽는다)오늘은,팔 월,일 일,일요일,태어난 지,구천 삼 백 이십 오 일,아침에 비온 뒤,구름걷히다. 손님:(소리)아줌마,여기 빼갈 하나 더 줘요! 민효:머리에 물방울이 떨어져 하늘을 보니,참새 한 마리,전신주에,앉아,있다.뒷산으로 가는,길이 좋아,무작정,따라,올라가니,동네 옆,기찻길이,비를 맞아,더욱,빛난다.
다시 기차소리.바깥의 소란스러움도 여전하다.쓰기를 멈추는 민효. 민효:기차를,타고,바다를,건넌다.사람들은,보이는 것만,믿으려,한다….
박씨가 그림처럼 등장해서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워 문다.
민효:수평선을,보고,끝이라,생각한다….
박씨:새삼스레 외삼촌 처음 뵈었을 때가 생각나구마.
민효:언제부턴지,나는,내 별의,날이,무뎌졌음을,알았다….
박씨:마실 갔다가 밤 깊어서야 집에 왔는데,웬 낯선 중 하나가 아랫목에 떠억 버티고 앉아 있데.중은 중인데,차림이 하도 어지러워서 단번에 행각승인 줄 알았제.그런데 대뜸 어머이가 외삼촌이라 카믄서 인사드리라 안 하나.
민효:헤겔은,아침마다,조간신문을,읽으며….
박씨:그 날 날밤 샜제.그 어른,나를 앞에 앉혀 놓고 풀어놓는 입담이 보통이라야 말이제.행행절절이더만.신기하기도 했고.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른도 어른이지만 입고 있는 거적데기 같은 승복이 그리 근사시러워 보일 수가 없데.
민효:아침기도를,드린다고,했다.아침기도를,하듯이,신문을,읽어내린다고,말했다.나는,춘화를,훔쳐보듯,신문을,엿,본다.신문은,현재이고,그 현재는,봐서는,안 될,춘화와 같기,때문이다….
박씨:한창 팔팔했던 나이에 혹 했던 기라.정신없이 얘기를 듣다 보이 금방 새벽닭 울더구마.그런데 어른이 집 나서믄서 내보고 하는 말씀이 내 낯판에도 역마구신이 또아리를 틀었다 안 하나. 민효:(쓰기를 멈추며)그 때 씨를 받은 거죠.
박씨:팔자였는가 어머이 돌아가시자 출상한지 이틀만에 뒤도 안돌아보고 통영땅 떠버렸제.단 하루도 그 구티막에는 못 붙어 있겄데.논 몇마지기 있던 것은 팔고,살던 집은 누구 줘버리고,구찮지 않을 정도로 몇 푼 챙기서 떠나온 것이 이십 년이 다 돼가구마. 민효:몸이,있지,않는 곳,아무런,인식조차,미치지,않는곳… (쓰기를 멈춘다)천등산에 가보셨어요? 박씨:가봤제.
민효:남한강은요.
박씨:거기도 갔었제.
민효:뭘 보셨죠? 박씨:안개밖에 없었제.미루나무가 있었고,겨울 짚더미가 가득 쌓였더마.
민효:다른 건요.
박씨:물오리도 있었제.물살 가를 때마다 가라앉는 안개가 휙휙피어 오르더마.
민효:다른 것도 있었을 거예요 분명.
박씨:(괜한 웃음)내가 본 거는 그것 말고는 없제.눈이 따라갈 마음같은 것은 훨씬 전에 끝이 났는 기라.
민효:처음부터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박씨:도망이었는지도 모르제.
민효:그럴 수도 있겠죠.한 때 사문에 있었다는 청학사 여관주인의 말만 듣고 아저씨를 따라 나섰던 것이 때론 황망하게 생각돼요.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아저씨가 사문의 옷을 벗어던진 연유가 결코 잡스럽지 않으리란 생각 때문이었 습니다.그러나 아저씬 집 떠난 20년에 대해서만 내게 줄곧 얘기했습니다.
아저씨가 본 것은 물오리 한마리,가라앉은 안개,집 지키는 개,선짓국집 여자,신작로,협궤열차,철쭉 핀 고원,그리고 몇 개의 시구절 뿐이었습니다.그것들은 전에도 있 어 왔고 세월이 괜찮다면 앞으로도 남게 되겠죠.아닙니다.제가 보고싶었던 건 그런 게아녔습니다.사람이 물 속에 빠져 죽고싶을 때가 있습니다.키 큰빌딩 꼭대기에서 발 밑 세상으로 오히려 몸을 던지고 싶을 때가있는 법이에요.그런데 아저씬 떠나셨죠.그것이 재미없었던 겁니다.잡스럽게 말이죠.
박씨:궂은 세월이었는데,앞으로도 모르는 일이고….
민효:아저씨.듣고 계세요? 박씨:(일어서며)바람이 차더만 어제로 여름 다 갔다.세월이 좋다 해도 한 여름 매미울음 같기야하겄나. 민효:아저씨! 박씨:(문득 돌아서며)그거이 안 되이,사는 게 이 지랄이제.
박씨,나지막한 콧노래와 함께 퇴장하면 조명 어두워지고,바깥의떠드는 소리 요란해진다.다시 기차소리.황망한 민효의 모습.
-식당 민효父,의자에 앉아 신문을 본다.지친 모습.곁에서는 민효母가 바닥을 쓸고 있고 비가 오는지 세찬 물방울소리가 들린다. 민효母:그만 들어가세요.
민효父:임자나 대충하고 좀 쉬어.
민효母:마저 끝내야죠.민희 밥도 챙겨놔야 하고.
민효父:민희는 요즘 왜 이렇게 늦는대.
민효母:바빠서겠죠.여름철이라 바캉스 용품이 많이 나간대요.백화점 일이란게 그렇잖아요.잠시 앉아 있을 시간도 없다던데.
문 두드리는 소리 민효母:민희니.
(소리) 어머니 문 좀 열어주세요! 민효母:대성에 총각들인가봐요.어떡하죠.
민효父:열어 줘.파업인가 뭔가 한다고 심란했던가보네.
민효母:기다려요.
민효母가 무대 한 쪽으로 퇴장하고 곧바로 종수,정길과 함께 들어 온다.두 사내,비를 맞은 모양이 눅눅하고,이미 술에 취해있다. 민효母:비도 오는데 그냥 들어가지 않구.
정길:(종수를 부축하며)아버님.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민효父:벌써 한 잔들 했구만.
정길:(종수를 흔들며)선생! 아버님께 인사 드려야지.
종수:아버님이십니까.충성! 어머님도 계시네.충성! 민효母:고막 터지겠네.
민효父:그래 해장할려구? 정길:예.(종수를 가리키며)우리 한선생이 아버님 해주시는 짬뽕국물이 그립다고 해서 이렇게 왔슴다.죄송합니다아.
민효父:그리로 앉어.금방 끓여줄 테니까.술은? 정길:딱 한 병만 주십시오.
민효母:취했는데 또 무슨 술이야.
정길:어머님도 참.국물만 마실 순 없잖습니까.
민효父:당신,술 한 병 꺼내다 줘.
민효父,주방으로 들어가고 사내들은 자리를 잡아 앉는다.드세지는 빗소리.
이 때 민희 입장.언제나 그렇듯 못마땅한 표정.
민효母:저녁은 먹었니? 민희:그럼 밥 굶고 다닐까봐.
정길:안녕하세요.
민희 대꾸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정길:따님이 참 봄날이십니다.
민효母:아직 어린애야.철 없고.요즘은 취직했다구 얼굴 보기도힘들어. 민효父:(소리)민희엄마.들어와서 조갯살 좀 다져.
민효母:금방 끓여올 테니까.맨술 마시지 말어.(주방으로 퇴장) 정길:어이 한선생 벌써 취했나.
종수:너,내 생일이 언젠지 아나? 정길:십이월 이십육일.
종수:짜식이 아는구만.구리스마스 다음날이다 이거야.예수가 바로 내 형이다,이 말씀이야.
정길:주여! 종수:그래.이 참에 몽땅 회개해.내가 우리 형한테 얘길해서 용서해주라고 그럴게.
정길:얘길 똑 바로 해.술 먹고 하지 말고.
종수:너,우리 형이 주당이었던 거 몰라.십자가에 못 박힐 때,그 새를 못참아서 포도주 마시고 죽었잖아.
정길:그래.자네,예수동생은 지금껏 뭘 했는고.
종수:한 게 많지.
(곡조를 붙여)나 태어나 이 강산에 싸나이 되어.쇠붙이 먹고산 지 어언 십여년.
정길:좋다.계속 연결.
종수: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이 때 걸인 등장.손에 껌바구니를 들고 손을 내민다.
종수:가엾은 양이 왔구만.(주머니를 뒤지며)어디 보자.(천 원짜리 하나를 내민다)여기.
걸인이 돈을 받고 그냥 나가려 한다.
종수:여봐요.껌은 주고 가야죠.
걸인,껌을 주고 다시 돌아선다.
종수:이것 봐요.잔돈! 걸인,가진 게 없다는 몸짓.
정길:돈이 없다는데.
종수:저거 순 날강도 아냐.껌 하나에 천 원씩이나 받아 먹고.안돼.돈 도로 내 놔.
종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돈을 빼앗으려 한다.민효母가 주방에서나온다. 민효母:또 왔어! 아침에 밥 한그릇 먹고 갔잖아.자꾸오면 어떡해.
종수:오호라 이제 보니 상습구걸범이구만.돈 내놔.안 내놔! 아주 이게.
민효 등장.종수의 손아귀에 잡힌 걸인을 보고 종수의 손을 떼어낸다. 민효:됐어요.가보세요.
걸인 퇴장 종수:자네 나하구 얘기 좀 해.
민효:바쁩니다.
민효母:민효야.
종수:이것 봐.형님이 부르잖어.
민효:뭐죠? 종수:정신상태가 글렀어! 천 원이면 라면이 다섯개고 담배 한 갑이야! 민효:외상이나 갚으쇼.
종수:(다가서서 민효의 머리를 쥐어 박는다)이노무 자식이.
민효:왜 때려 존만아! 달려드는 민효.엉겨붙은 두 사람.그러나 종수의 완력이 워낙 세다.민호父가 주방에서 나온다.
민효父:뭣들 하는 거야.
종수,민효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민효母:자네가 이해해.
종수: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민효:울 엄마가 왜 니 엄마야!(다시 덤빈다) 민효父:(종수에게 덤비는 민효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이리 나와! 민효:(끌려가며 울부짖는다)울 엄마가 왜 니 엄마야.취소해.취소하란 말야. 무대 어두워진다.
-민희의 방 거울앞에서 출근준비를 서두르는 민희.민효母 등장. 민희:아침 생각없어.
민효母:… 민희:왜 그래.아침부터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민효母:너 나랑 얘기 좀 하자.
민희:뭐야.시간없단 말야.
민효母:(피임약 봉지를 꺼내며)이게 뭐야.
민희:이리 줘.
민효母:어떻게 된 거니.얘길 좀 들어보자.시집도 안 간 처녀주머니에서 이런 게 왜 나와.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거니.얘길 해보라니까.너 아버지가 알면 어쩌려구.
민희:그 아버지 소리 좀 안 할 수 없어?너네 아버지가 어떻구.아버지가 알면 어쩌려구.허구한 날 그 아버지 소리 듣는 것도 이젠 지겨워.
민효母:민희야.
민희:동네꼬마들이 뭐라는 줄 알어? 내가 지나갈 때마다 짱께이 집 딸이래.저어기 짱께이 집 딸 간다.짱께이 집 딸 치마 입었다.내가 왜 동네꼬마들에게까지 그런 놀림을 받아야 돼? 떨어져 살고 싶어.엄마가 신주처럼 모시는 아버지는 물 론이고,무능한 오빠하며 전부 꼴보기 싫단 말야.
민효母:그래 나가.그렇게 지겨우면 따로 살자.그만큼 키워놨으면 무얼 못하겠니.나가.나가서 니 하고 싶은대로 하며 살어.
민희,핸드백을 챙겨들며 급히 퇴장.
민효母:얘 민희야.민희야.
무대 어두워진다.
-식당 주방에서 나는 칼질소리와 함께 조명 켜지면 민효母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급하게 등장하는 정길.차림이 엉망이고 숨이 차다.
정길:물 한 잔만 주세요.
민효母:무슨 일 있었어? 정길:종수놈이 잡혀 갔어요.
민효母:잡혀가다니.누구한테.
정길:누구긴 누구예요.짭새들이죠.
민효父:(주방에서 나오며)뭐가 어떻게 됐다는 게야.
민효母:종수 총각이 경찰한테 잡혀 갔대요.
정길:글쎄 간부놈들이 경찰하고 합세해서 트럭으로 밀어붙이잖아요.노조원 몇 명 갖고는 어림도 없었어요.계속 밀리니까.그 자식이 글쎄.
민효父:물부터 마시고 차근차근 얘길 해봐.
정길:(물을 들이키고나서)갑자기 신나를 분무기에 쏟아붓는 거예요. 민효父:그래서 사람이 다친거야? 정길:다치진 않았을 거예요.그냥 위협용이었으니깐요.(다시 물을 들이키고 나서)가봐야겠어요.이따 올게요.
정길이 퇴장하려 할 때,배달을 다녀오는 민효와 마주친다.못본체 퇴장하는 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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