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일·중 밀월’과 동북아 신질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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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후 일본 언론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 가운데는 이른바 ‘친미 보수파’그룹이 있다. 이들은 중국이 군사적 위협이자 가상 적국이므로 일본에 유일한 전략은 ‘미·일 동맹’이라고 주장해 왔다. 말하자면 ‘일·미 동맹 신성론(日米同盟神聖論)’이다. 이를 위해 중국은 절대적인 공포의 대상으로 가공돼 왔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의 ‘고백’으로 이제 이 논의는 근거를 상실했다. 더구나 임기 말을 맞이하면서 조지 W 부시 정권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관련 외교정책과, 서브프라임 문제가 중심에 서 있는 경제 정책이 파탄에 이르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이에 따른 혐오감으로 일본에서도 반미 감정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미국의 요청으로 파견한 인도양 해상자위대의 급유 지원 활동의 지속을 둘러싼 논쟁에서 패배해 물러난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경우가 결정적이다. 결국 집권여당인 자민당은 아베를 대신해 ‘신중파’로 알려진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를 내세워 노골적인 ‘친중(親中)체제’에 들어갔다.

일본의 친중파는 ‘미국과는 잘 안 되니까 중국에 의지한다’는 발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마저도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카터 전 대통령의 고백으로 미·중 대립이 거대한 연극이라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러면 그렇지. 중국은 역시 위협적인 상대는 아니었다”며 못 들은 척하며 태연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세계 최대의 신흥 성장 시장으로서 세계의 부(富)를 빨아 올리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더 애를 쓸 것이다. 제1야당인 민주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에 이어 후쿠다 총리가 중국을 방문한 것이 이런 흐름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미·중 관계는 지난달 중국이 미 해군 함정의 홍콩 기항을 거부하면서 골을 깊게 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장정(長征)’시대부터 미 해군과 은밀하게 연결돼 온 만큼 이번 실력행사가 미국에 끼친 충격은 크다. 현재 중국은 확실히 미국이 아닌 유럽(영국)에 의한 지원을 받으면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도 단순히 ‘미국과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이다’라는, 상투적인 ‘일·중 밀월론’을 신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미국과 선을 긋고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중국의 동향을 주시해 이 신질서가 공평하고 평화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 역시 새로운 질서 구축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해야만 한다. 특히 돌발적인 미·북 화해 무드, 남북 간 경제 교류의 급격한 활발화 등 신질서의 ‘태풍의 눈’이 될 한반도와의 전략적이고 긴밀한 동맹이야말로 일본에 필요하다. ‘친미 보수파’와 같이, 일본의 뿌리 깊은 ‘감정적 혐한론(嫌韓論)’도 이런 의미에서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고, 결국에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하라다 다케오 국제전략정보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