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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와 숫자’로 돌아본 2007년 증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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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23면

일러스트=강일구

2007년은 한국인의 ‘투자 DNA’가 바뀐 해로 기록될 만하다. 펀드 대중화 시대가 활짝 열린 가운데 국내외 증시가 활활 타오르면서 투자자들의 주머니가 불룩해졌다. 투자자들은 전문가들이 굴리는 간접투자 상품에 돈을 장기간 묻어두는 게 고수익의 첩경이란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옥에 티도 있었다. 돈 된다는 소문에 혹한 ‘묻지마 펀드 투자’가 그랬다. 함박웃음과 아쉬움이 교차한 지난 1년의 증시를 키워드와 숫자로 되짚어 봤다.
 
●2K 시대

‘2000·쌀국장·중국 … ’ 투자자 웃고 울어

지난 7월 25일. 마침내 축포가 터졌다. 서울 여의도의 증권선물거래소 전광판엔 ‘2004.22’란 숫자가 찬란했다. 코스피 지수가 ‘2K 이정표(K는 1000)’를 찍은 것이다. 1000포인트를 넘은 지 2년5개월 만이었다.

긴 터널을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코스피는 1989년 봄 처음으로 1000포인트를 돌파했다. 방방곡곡이 탄성이었다. 그러나 ‘4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그 뒤로도 코스피는 힘을 못 쓴 채 500~1000포인트를 맴도는 ‘박스권 신세’였다.

하지만 계속된 저금리와 풀이 죽은 부동산이 빚어낸 ‘돈의 풍년’이 세계적인 증시 오름세와 섞여 코스피에 날개를 달아줬다. 10월 31일엔 2064.8로 사상 최고치의 금자탑을 쌓았다. 비록 코스피는 여름 이후 조정을 거치며 결국 1900선 아래로 밀렸지만 투자자들의 눈높이는 이미 2000선 위로 올라서 있다.
 
●펀드 혁명

“네 펀드는 어땠어?” 올 송년회의 화두 중 하나였다. ‘1가구 1펀드’ 시대의 자화상이다. 지난해 말 46조원 덩치였던 주식형 펀드는 113조원으로 145% 불었다. 1240만 개였던 펀드 계좌도 1년 만에 2120만 개를 넘어섰다. 대한민국 가구수(1600만)를 추월한 것이다.

이유는 있었다. 뜀박질하는 주가로 관심이 쏠리자 장기 고수익을 올린 펀드로도 시선이 옮아갔다. 정부가 환율안정을 위해 해외로 원화를 내보내려고 봄부터 해외펀드에 세금을 물리지 않기로 한 것도 한몫했다. 그 즈음 중국이며 신흥시장 펀드가 쏟아져 나와 투자자들을 사로 잡았다. 저축에서 투자로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펀드 혁명’은 시작일 뿐이다. 미국에선 베이비 부머들이 40~50대에 도달한 80년대 중반에 펀드가 만개했다. 한국도 그 연령대 인구가 2015년까지 자산시장에 쑥쑥 들어오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래에셋 신드롬

“미래에셋의 인사이트 펀드 팝니다.” 이런 현수막을 내건 곳은 경쟁사 지점이었다. 기현상이었다. 펀드 고객들이 앉자마자 “미래에셋 주세요”라고 요구하니 도리가 없었다. ‘인디펜던스 펀드’와 ‘미차솔(미래에셋차이나솔로몬) 펀드’ 등으로 불붙은 미래에셋의 파워는 10월에 나온 박현주 회장의 야심작 ‘인사이트 펀드’로 절정에 달했다. 인사이트는 판매 한 달도 안 돼 4조원을 끌어 모으는 괴력을 발휘했다.

지금 미래에셋은 주식형 펀드의 30%를 점하는 거인이 됐다. 미래에셋이 사면 오른다는 말에 ‘미래에셋 따라하기’ 열풍도 불었다. 그러나 미래에셋은 최근 펀드매니저의 선행매매 루머로 곤욕을 치렀고, 금융감독원의 펀드판매 조사를 받기도 했다. 펀드가 주식을 쥐고 기업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펀드 자본주의’가 확산하면서 미래에셋에 대한 경계심도 커지고 있다. 내년에도 미래에셋의 인기는 식지 않을 것 같다. 시장 변화의 맥을 미리 짚어내고 길목을 지키는 감각과 배포에 투자자들이 신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4500억 달러 폭탄

작은 불씨가 광야를 불태운다고 했다. 미국 모기지(장기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10%밖에 되지 않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이 글로벌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올 2월 영국 HSBC은행이 서브프라임 투자손실로 순이익이 줄었다고 고백한 게 도화선이 됐다. 그 뒤 서브프라임이란 말은 유동성 풍년과 자산거품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대명사가 됐다.

서브프라임 부실은 4~5월 1차, 8~9월 2차, 10~11월 3차에 걸쳐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미국·유럽의 중앙은행들이 긴급 자금을 쏟아 붓거나 금리를 내려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고 노력했지만 글로벌 경제는 여전히 불확실성 늪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서브프라임 피해액은 1500억~4500억 달러(150조~45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영국 등 주요국의 집값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서브프라임 파장은 내년에도 투자자들을 옥죌 전망이다.
 
●944% 대박

올해 상승률 1위 주식은 ‘대한화재’였다. 지난해 말 1800원이던 주가가 1만8800원으로 로켓포 비행을 했다. 상승률은 944.4%에 이른다. 코스피 상승률(32%)보다는 30배나 잘했다. 눈에 띄는 상승 연료는 인수합병(M&A) 재료였다. 마침 보험사들 실적이 조명받던 와중에 대주주인 대주그룹이 롯데그룹에 팔기로 하면서 주가가 달음박질했다.
한국석유·한국기술개발·사조산업처럼 수백% 뛴 대박주도 많았다. M&A와 자원개발·경영권분쟁 같은 테마에서 급등주가 쏟아졌다. 돈의 홍수 속에서 투자자 관심이 중장기 실적보다 단기 모멘텀에 많이 쏠린 것이다.

거꾸로 ‘쪽박 주식’도 있었다. 마이크로닉스·세안·ACTS 등은 실적부진 등으로 70% 넘게 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펀드 시장에서도 ‘안습 펀드’라는 말이 유행했다. 안구에 습기 차서 눈물이 나듯, 수익률이 나빠 투자자를 울리는 펀드를 빗댔다. 연초 유망주로 소개됐다 우울한 성적표로 지탄받은 일본펀드와 리츠펀드·물펀드 같은 상품이 대표적이다.
 
●24조원

외국인 투자자들은 올 한 해 한국 주식을 줄기차게 팔았다. 순매도 금액은 무려 24조7000억원에 달했다. 외국인 매도액은 2005년 3조원, 2006년 10조원 등으로 갈수록 태산이다. POSCO와 삼성전자·현대차·SK처럼 간판주를 많이 팔아 재미를 봤다. 주가가 쌀 때 사놓아 이익실현 욕구가 커진 데다 미국발 신용위기 우려로 한국 시장에서 돈을 빼 본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올해 10조원 넘는 주식을 샀다. 장을 떠받친 본진(本陣)이었다. 펀드로 몰린 장삼이사 투자자들의 돈이 힘이 됐다. 기관은 2년 전 7조원어치의 주식을 샀다가 지난해엔 10조원, 올해도 비슷한 규모로 점점 땅을 넓히고 있다. 외국인이 토해낸 매물을 기관이 넘겨받은 셈이다. 외국인 매도는 ‘셀 코리아’라며 호들갑떨 일만은 아니었다. 한국 증시가 꾸준히 오르면 그 과실을 한국인들이 보다 많이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의 매도와 차익실현은 2008년에도 이어진다는 분석이 많다. 다만 오일머니·신흥시장자금·국부펀드 같은 돈이 한국 시장에 들어와 기존 외국인 자금 이탈을 상쇄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차이나 파워

중국 펀드의 수익률이 100%를 넘었다. 단기속성반도 이만한 게 없다. 2월엔 정부의 긴축 소식에 주가가 출렁했다. 하지만 그 뒤론 자고 나면 주가가 올라 한국인 돈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였다. 지난해 말 3조원이었던 중국 펀드 규모는 지금 17조원을 넘었다. 펀드 수도 20여 개에서 100개를 돌파했다. 돈을 한 곳에 몰아넣는 ‘올인’ 투자자를 양산한 것도 중국 펀드였다. 투자자들은 중국의 모든 것에 신경을 곧추세웠다.
중국 돼지고기가 인플레 복병이라는 뉴스도 화제였다.

주식도 조선·철강·기계 같은 ‘중국 관련주(China play)’들이 돌격대 역할을 했다. 시가총액 1위였던 삼성전자 주가는 수개월간 POSCO에 역전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펀드는 필연적인 ‘거품 논란’을 낳았다. 한국의 주가수익비율(PER)이 13배인데 중국은 50배를 넘었다. 기업 실적에 비해 주가가 비싸다는 핀잔을 들을 만했다. 중국 증시는 올해 급등한 주가가 부담스럽지만 내년에도 20% 안팎의 수익률은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기대하고 있다.
 
●한국판 골드먼삭스

6월에 자본시장통합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2009년부터 금융의 칸막이가 걷어지게 됐다. ‘증권업 빅뱅’의 시동이 걸린 것이다. 첨단 신상품을 만들기가 쉬워져 돈이 증시로 몰리고, 자기자본투자(PI)를 통해 인수합병(M&A)에도 마음껏 뛰어들 수 있다. 거대 증권사가 출현하는 것은 필연적 대세다. 이 때문에 ‘한국의 골드먼삭스’가 나온다는 기대감이 이는 것이다.

은행들은 더욱 위기감을 느낄 것이다. 최근 펀드로 돈이 쏠리자 곳간이 비어 시름하는 통에 자통법이 제대로 가동하면 더욱 살 길 찾기에 바빠질 수밖에 없다. 마침 새 정부의 규제완화와 어우러질 금융의 새판짜기는 개인들에게도 쏠쏠한 ‘관전 재미’와 ‘투자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쌀국장

올해 투자마당 역시 미국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폭탄으로 주가가 떨어지면 금리인하 처방으로 응급주사를 놓았다. 한국 주가도 일희일비했다. 8월 중순의 급격한 조정기가 대표적이었다. 속에 불이 난 투자자들은 미국의 미(美)를 미(米)로 고쳐 ‘쌀국장’으로 불렀다. 이 말은 국립국어원의 신조어 명단에도 올랐다. 점심시간에 외국인의 선물 매도가 쏠리는 해프닝을 빗대 ‘도시락 폭탄’이란 유행어도 나돌았다. 미국을 보는 눈길은 내년에도 이어질 것 같다. 서브프라임 불길은 아직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다만 시장에선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1분기에 금리를 또 내릴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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