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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사형제 존치 쪽으로 기우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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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 12면

24일 서울 을지로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열린 ‘사형수에게 희망을’ 행사에서 안경환 인권위원장(가운데)과 홍보 대사인 첼리스트 정명화씨가 시민들에게 사형수 64명을 의미하는 장미꽃 64송이를 나눠주고 있다. [연합뉴스]

1997년 12월 30일 오전 대구교도소. 사형수 5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이었다. 한 사형수가 눈물을 흘리자 참관 나온 조성애 수녀가 그에게 물었다.

‘사실상 사형 폐지국’ 됐지만 존폐 논란 계속

“형제님. 슬퍼요? 가기 싫어요?”

“아니오. 그냥 눈물이 나네요. 이 세상에 태어나 감옥에 와서 과분한 사랑을 받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교수대가 있는 집행장과 조 수녀 사이에 차단막이 내려졌다. ‘사형수의 대모’로 불리는 조 수녀는 그날, 그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날 전국적으로 사형수 23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아무리 국가라고 해도 소중한 생명의 촛불을 끌 수 없는데…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 수녀는 그로부터 만 10년의 시간이 흐른 30일 오후 2시, 국회에서 열리는 ‘사형폐지 국가 기념식’에 참석한다. 이날 행사에선 현재 수감중인 사형수 64명을 상징하는 비둘기 64마리를 날린다. 하지만 조 수녀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대선이 끝났잖아요.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걱정스러워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영우 신부. 그는 23일 한 사형수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이 신부가 기자에게 보여준 편지의 한 대목. “요즘 사형 집행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 떠돌고 있습니다.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기강 확립 차원에서 전격적으로 집행한다고… 14년간 수없이 겪었던 터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지만….”

조 수녀와 사형수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새 정권 출범에 따른 ‘불확실성’ 탓만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주요 대선 후보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형제 존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선자는 선거 과정에서 “사형제도는 범죄 예방이라는 국
가적 의무를 감안할 때 유지돼야 한다”고 밝혔다.

더욱이 사형 집행을 유예해 온 김대중·노무현 정부와는 색깔이 확연히 다른 보수 정권이 출범한다는 점이 ‘사형제 폐지’ 진영을 긴장시키고 있다. ‘진보=폐지, 보수=존치’의 사형제 등식은 미국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올해 10개 주에서 42건의 사형이 집행됐는데 이 중 텍사스주가 26건(62%)이다. 텍사스가 ‘최다 사형집행 지역’이 된 것은 역대 주지사의 면면과 관련이 깊다. 전임 주지사인 조지 부시 대통령과 같이 공화당 출신인 릭 페리 현 주지사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강한 보수 성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 뉴저지주에서는 지난 17일 사형제가 폐지됐다. 민주당 출신으로 사형제 폐지를 주장해 온 존 코자인 주지사가 주 상·하원이 의결한 사형제 폐지 법안에 서명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사형제 존속 목소리가 높은 것은 보수 진영 쪽이다. 뉴라이트 운동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자유주의 연대’의 부대표 이재교 인하대 법대 교수. 그는 “연대 참여자 가운데 사형제 존치를 지지하는 인사가 훨씬 많다”며 “좌파가 눈에 보이는 사형수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달리 우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의 고통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이나 지존파·막가파 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무고한 시민의 목숨이 흉악범에게 희생당하는 것이 더 비인도적인 일 아닙니까.”

이 교수는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사형제 폐지 후 흉악범죄가 급증하지 않은 것은 당시 치안 상태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라며 “그렇지 못했던 영국에선 폐지 후 20년간 살인범죄가 60%나 증가했다”고 말했다. 강력사건이 잇따르고 있는 우리나라도 사형제를 폐지할 때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는 “법원이 선고한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면서 “누가 대통령이든 사형 집행 결정문에 서명하고 싶지 않겠지만, 법을 지키는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월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사실상 사형 폐지국’을 선언한 데 이어 30일 기념식을 여는 데에는 보수 진영의 반격에 쐐기를 박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른바 ‘기정사실화’ 전략이다.

국회의원 175명의 서명을 받아 사형제 폐지 법안을 발의한 유인태(대통합민주신당) 의원. 그는 “과반수의 지지를 얻고도 국회 법사위의 처리 기피로 17대 국회 내 처리가 무산되게 생겼다”면서도 “사실상 폐지국이 된 만큼 제도적인 정비만 남아 있는 셈”이라고 했다.

“국제사회에서 사형을 안 시키는 나라로 인식됐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형을 부활시키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다음 국회에서는 반드시 사형을 폐지하고,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바꿔야 합니다.”

이영우 신부도 “우려는 있지만 임기를 시작하면서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며 “반기문 총장이 있는 유엔총회에서 사형집행 유예 결의안을 채택한 것도 제약 요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무 부처인 법무부 측은 ‘사실상 폐지국’ 진입에 대해 “국제기구의 분류 기준일 뿐 법적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존폐 논란에 대해선 “사형의 실효성과 국민 여론 등을 놓고 신중하게 검토할 문제”라는 기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결국 사형 집행에 대한 결정은 이 당선자에게 넘어가게 됐다. 기자는 이 당선자 측에 구체적인 입장을 밝혀줄 것을 요청했다. 당선자 대변인인 주호영 의원은 “당선자의 뜻을 확인해 보겠다”며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이틀 만에 나온 답변은 “사형제 폐지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에 변함 없다. 집행 여부에 대해선 언급할 단계가 아니다”는 것이었다. 다만 “대량 인명 살상이나 반인류적 범죄 같은 예외적인 경우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일단 중심 추는 사형제 존속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지만, 실제 집행까지 하는 데에는 상당한 정치적 고려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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