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50주년 本社기획천지.백록담에 통일햇살을 염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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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여기는 백두산,저 박인식입니다.훈규형 잘 들립니까.』『인식이냐,나 훈규다.얼마나 전화를 기다렸는데….』 광복 50주년인95년을 맞아 통일을 기원하며 본사가 기획한「백두산.한라산 동계동시등반 전화교신」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지난해 12월11일오후3시30분(중국시각 오후2시30분).
박인식(산악인이자 작가)씨의 목소리가 흥분 때문인지 떨렸다.
거센 바람을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던 백두산팀과 전화가 오지 않아 애를 태우던 한라산팀의 나머지 일원들도 이 때만은 숙연해졌다. 백두산정상은 몸을 날려버릴듯 거센 바람으로 체감온도가 영하40도를 오르내렸고 한라산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듯 흐렸다.
국내 최초로 이루어진 백두산과 한라산 정상의 교신은 마치 우리 민족이 분단 50년동안 가슴에 담아왔던 한(恨)을 반영하듯이러한 악천후 속에서 어렵게 시작됐다.
교신은 중국에서 빌린 휴대폰((900)979)과 제주의 산악인 박훈규씨의 휴대폰((691)2774)으로 이루어졌다.
교신은 엄청난 추위로 인해 금방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되고 으르렁거리는 바람소리 때문에 간간이 끊어지고 잘 들리지 않았으나두 통화자는 끈기를 가지고 10분여동안 통화를 시도했다.
『우리 민족의 성지(聖地)백두산을 중국을 통해야만 오를수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고 말문을 연 박인식씨의 말에 박훈규씨는『광복 50주년인 95년에는 반드시 남북의 산악인들이 우리 땅,우리 길을 통해 함께 오르자』고 답했다.
전문 클라이머를 포함,각4명으로 편성된 백두.한라 취재팀은 분단50년의 아픔과 한(恨)을 되씹으며 통일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산제(山祭)를 올리며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다.
백두산과 한라산간의 직접 국제전화교신이 완전히 성공을 거둔 것은 이번이 처음.뒤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취재팀이 교신을 시도하기 바로 3일전 백두산밑 이도백하(二道白河)에 무선중계탑이 세워졌기 때문에 백두산에서의 국제전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 국토의 남북 끝이자 최고봉.그 정상교신은 바로 겨레의 교감을 뜻한다.
해방50년의 기쁨이 바로 남과 북의 만남과 악수로 이어질 수없을까. 이번 백두.한라 동계동시등반은 처음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겨울이면 입산을 금지하는 중국정부로부터 백두산 입산허가를 받는 것이 문제였다.
전문 산악인들조차 백두산 겨울등반 경험이 거의 없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표명했다.휴대폰에 의한 백두산 정상과한라산 정상간의 직접 통화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통일의 과정이 그렇듯이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도전하는 것이 바로 등반의 정신이다.
백두산 취재팀은 지난해 12월7일 서울을 떠나 항공편으로 서울~상하이(上海),상하이~창춘(長春)을 거쳐 밤열차로 창춘~옌지(延吉)까지 갔다.
이어 옌지에서 밤길 3백60㎞를 달려 베이스캠프격인 소천지 근처 1천5백m 지점의 두견산장에 도착한 시각은 10일 오전4시30분.
겨울철이면 종업원들이 모두 철수해버리는 두견산장은 우리 취재팀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3일간 산장문을 열기로 특별히 배려해 주었다.
취재팀은 단지 날씨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3시간정도 새우잠을 잔 뒤 12월10일 오전8시30분 산행을 시작했다.
같은날 오전6시 한라산 취재팀은 관음사코스를 이용해 정상에 올랐다. 백두산은 며칠전에 내린 폭설 때문에 눈이 1m50㎝이상 쌓여 있었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 때문에 중국령 백두산 최고봉인 천문봉에 오른 시각은 당초 계획보다 2시간정도가 더 늦은 오후4시.
겨울등반 경험이 전혀 없는 옌지 조선족 짐꾼 2명은 미리 겁을 집어먹고 산 밑으로 달아나 버린 뒤였다.
전화를 걸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그 시간 한라산팀은 백두산팀에서 연락이 없자 휴대폰을 끄고 일단 윗세오름산장으로 하산했다. 첫날 악천후 때문에 교신을 포기했던 백두산 취재팀은 천문봉 바로 밑 무인(無人)기상관측소에 텐트를 쳤다.추위로 인한휴대폰 방전을 우려,교신은 자제했다.
드디어 11일.새벽부터 우리는 초조했다.가져온 식량과 연료는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게다가 바람은 더 거세게 불었다.몸이 가벼운 사람은 날아갈 정도였다.영하30도와 거센 바람에 따른 체감온도는 영하40도.
그러나 더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마지막 남은 수프로 점심을떼운 우리는 서로의 몸을 자일로 묶고 오후 2시10분 다시 천문봉을 올랐다.
바람은 거셌지만 다행히 통화는 가능했다.오히려 거센 바람이 천지와 천문봉을 뒤덮은 구름과 안개를 가끔씩 대나무를 쪼개듯 갈라놓았기 때문에 간간이 전망이 트여 사진촬영도 가능했다.
우리가 짐을 꾸려 천문봉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것은 오후3시20분. 스키고글과 윈드재킷의 모자조차 날려버리는 강풍을 맞으며두견산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7시10분.이제 완전히 성공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우리는 다시 반문했다.
『왜 우리는 우리땅을 두고 중국을 통해 돌아가야 했는가.곧장백두산에 올라 남북산악인이 함께 깃발을 올릴 날은 언제인가.통일은 언제나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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