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정치外風에 무용지물된 憲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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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헌법재판소 출범당시 많은 법조계 인사들은 헌재(憲裁)가 과연정치적인 외풍(外風)을 이겨내며 제 역할을 해낼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종래 헌법위원회가 15년여동안 단 한건의 사건도 처리하지 못했듯 헌재 역시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 한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29일의 헌재 결정은 이같은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음을 확인해 주는듯 하다.
제2기 재판부 구성후 처음 결정을 내린 이날 헌재는 강도살인혐의로 사형이 확정된 孫오순(90년 사형집행당시 26세)씨가 사형제도를 규정한 형법 338조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에 대해『당사자가 사망했다』는 이유로 종료결정을 내렸 다.정작 사형제도 위헌여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1기 재판부에 1차적 책임이 있지만 헌재는 90년5월 헌법소원을 접수한뒤 孫씨가 사형을 당하기까지 7개월간의 심리기간이 있었음에도 결정을 미루어 오다 당사자가 숨져 사건이 끝났다는 선언을 하기 위해 4년의 시간을 끈 셈이 됐 다.
헌재는 또 이날 한국노총이 노조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노동조합법 12조가 헌법에 위배된다며 낸 헌법소원에 대해서도『청구기간이 지났다』는 형식적 이유를 들어 조승형(趙昇衡)재판관을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각하했다.
헌재가 문을 열기전 공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기간은 헌재 개소일(88년9월19일)부터 계산해야 하므로 노총이 91년7월 헌법소원을 낸 것은 청구기간을 넘긴 것이라는게 각하 이유였다.
그러나 이러한 헌재의 논리에 따를 경우 당사자가 헌재 출범전설립된 단체등이라면 그 이전의 법률에 대해선 모두 청구기간이 지났으므로 헌법소원을 내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 된다.
또 접수된지 1백80일 이내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헌법재판소법상의 규정은「강제성이 없다」고 무시한채 수년동안 시간을 끌면서 청구인의 청구기간 규정에 대해선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견강부회(牽强附會)」식의 억지논리라는 비난이 만만 치 않다.
헌재는 조만간 검찰이 주장하는 공소시효를 이미 넘긴「12.12사태」헌법소원사건을 비롯해「국회날치기」헌법소원등 많은 민감한사건들을 처리해야 한다.
만약 헌재가 이러한 관심사에 대해 계속 공소시효등의 형식적인문제를 이유로 본안에 대한 판단을 회피한다면 국민들은 최종 권리구제기관으로서 헌재의 존재의미에 회의를 갖게 될 것이며 헌재무용론(憲裁無用論)이 대두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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