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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드문 시대에 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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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리 어머니가 내 나이였을 땐 손자가 열 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물론이고 내 가까운 친구들도 아직 할머니 소리를 듣지 못한다. 뭐 우리가 젊어 보여서가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이 도무지 아이를 낳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 딸을 막론하고 서른이 훌쩍 넘었어도 결혼한 아이들이 거의 없는 데다 어쩌다 결혼한 아이들도 아직은 '감히' 아이를 낳을 엄두를 못 내고 있는 터다.

그래서 나와 친구들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했다는 발표를 보고는 아니 어느 결에 그렇게 됐느냐고 놀랐지만 그 숫자가 1.17명이라는 소식에는 도대체 아직도 누가 아이를 낳는 거지? 하고 더 놀랄 정도였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손자 없는 할머니로 살까봐 걱정이 되어 아이들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정작 강하게 권하지는 못하는 게 요즘 우리 또래들의 딜레마다. 아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심정과 상황을 너무나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가끔 가다 출산은 여성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며 아이를 낳지 않는 요즘 젊은 여성들을 너무 이기적이라고 근엄하게 꾸짖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동안 의무를 열심히 수행했던 여성들에게 왜 응당한 대우를 해 주지 않았을까.

일과 아이 사이에서 곤죽이 된 여성들에게 왜 네가 좋아서 한 일이니 끝까지 네가 알아서 하라고 나 몰라라 했을까. 국가와 남성들이 대한민국 여성들의 힘겨운 삶을 뒷짐지고 구경만 하고 있는 동안 젊은 여성들은 나는 선배들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굳게 결심했던 거다.

출산을 의무로 받아들였던 세대는 우리로서 끝이다. 요즘 젊은 여성들에겐 결혼도 출산도 모두 선택사항일 뿐이다. 아이를 안 낳는 건 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현명하기 때문이다. '낳아 놓으면 어떻게 자라겠지'라는 주먹구구가 아니라 제대로 키울 수 있나 없나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평가한 결과다.

그들은 두렵다. 단기적으론 보육이 걱정이고 장기적으론 교육이 걱정이다. 자신도 학벌의 쓴맛과 단맛을 질리도록 경험했는데 요즘처럼 전업주부가 일류대 입시에 훨씬 더 경쟁력이 있다는 이야기라도 들을라치면 아예 낳기도 전에 기가 죽는다. 그래도 혹 내 아이가 대학 갈 무렵에는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당장 급한 게 보육이다. 아이를 누구에게 맡기나.

최근 보육정책이 전환점을 돌고 있어 좀 참고 기다리면 보육 문제가 잘 풀릴 것도 같지만, 개인적으로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들, 아직 손자를 보지 못한 예비할머니 세대는 매우 착잡한 심정이다. 보육시스템이 완비될 때까지 그러면 우리가 손자를 키워 줄 것이냐 모른 척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려면 또 다른 여성의 도움이 필수적이란 걸 우린 잘 안다. 평생 동안 일을 계속한 내 친구들 뒤에는 대부분 어머니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할머니나 외할머니들이 든든한 보육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여성에게 일이 필수가 된 이 시대에 할머니의 역할은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나, 할머니도 여성이고 그들도 변했다. 손자 없는 할머니가 되기란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손자를 키워 주겠다고 선뜻 나서지도 못하겠다.

앞으로의 자기 삶도 버겁고, 힘도 달리고, 잘 키울 자신도 없다. 아무래도 아이들은 당분간 더 줄어들 것 같다. 셋째를 낳으면 20만원을 준다나 뭐라나 하는 따위의 유치한 발상 말고 정말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들게 만드는 그런 대책들이 줄줄이 나올 때까지는.

박혜란 여성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