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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한 거리의 ‘검은 대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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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호 12면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그동안 할리우드 영화에서 나온 흑인 갱단의 면모는 거의가 동네 양아치 아니면 무조건 죽고 죽이는 막무가내 유형의 무법자들이었다. ‘대부’의 이탈리안 마피아 같은 품격은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범죄조직으로서의 규율과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진 흑인 갱을 보는 것조차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몇 년 전까지 미국 내 소수 인종 중 최다였던 아프로 아메리칸, 즉 흑인들의 범죄조직은 겨우 그 정도, 수공업적인 집단에 불과했던 것일까? 하지만 분명히 현실은 다를 것이다.

덴절 워싱턴과 러셀 크로의 ‘아메리칸 갱스터‘

전설적 흑인 갱, 프랭크 루카스
‘글래디에이터’ ‘블랙 호크 다운’의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아메리칸 갱스터’는 1970년대에 실존했던 흑인 갱 프랭크 루카스(덴절 워싱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큰 마약 판매 조직의 보스이며 할렘의 자선사업가였고 동시에 유명인사들과 친분을 나누는 사교계 인사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마피아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지만, 흑인들의 범죄조직 역시 중국인이나 이탈리아인과 충분히 어깨를 겨룰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그 중심에 프랭크 루카스라는 출중한 인물이 있었다. 리들리 스콧은 과감하게도 루카스에게 ‘아메리칸 갱스터’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미국을 대표할 만한, 그리고 가장 미국적인 갱스터로 그를 내세운 것이다. 대체 프랭크 루카스가 어떤 인물이었기에?

1968년 프랭크 루카스가 섬기던 할렘 범죄조직의 보스 범피가 사망한다. 루카스는 갱단 두목이면서도 할렘의 흑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범피의 뒤를 따르기로 한다. 범죄를 저지르기는 하지만, 결코 사치와 향락에 물들지 않고 빈민들을 위해 돈을 쓰기도 하는 인물이 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이 필요하다.

루카스는 태국에서 군용기를 이용해 직접 마약을 들여오는 혁신적인 루트를 개척한다. 그리고 시중에 나도는 마약보다 순도는 2배 높고 가격은 절반인 ‘블루 매직’을 팔아 시장을 장악한다. 결국은 마피아를 비롯한 다른 범죄조직들도 루카스에게서 마약을 공급받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범죄에 시장원리를 도입하다
프랭크 루카스를 체포한 마약수사관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는 그가 “성공한 흑인 사업가, 게다가 진보적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루카스가 거물이 된 이유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생산자와 직거래를 하고, 더 질 좋은 상품을 더 싸게 판다면 당연히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기존의 사업자, 갱들이 그를 질투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루카스는 음모와 협잡 같은 것으로 다른 갱들의 이권을 뺏어간 것이 아니다. 루카스는 철저히 시장원리에 의해 승자가 되었다. 루카스에게서 마약을 공급받은 갱이 질 낮은 마약을 판매하는 일이 생기자, 그는 ‘블루 매직’이라는 이름을 쓰지 말라고 요구한다. 자신은 브랜드를 걸고 ‘사업’을 하는 것이고, 브랜드를 망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면서.

루카스가 현지에서 직접 마약을 가지고 온다는 말을 들은 한 수사관은 이렇게 말한다. “이탈리아 마피아가 100년 동안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깜둥이가 할 수 있냐고”. 인종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던 당시에는, 그것이 흑인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었다. 하지만 루카스야말로 가장 진보적인, 혁신적인 사업가였다.

고품질 저가격의 브랜드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안 마피아의 강점인 가족경영까지 받아들였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던 가족들을 뉴욕으로 부른 루카스는 가족의 신뢰를 바탕에 둔 조직을 운영한다.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 오기 전까지, 가족은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다. 또한 루카스는 향락에 빠지지도 않는다. 부와 권력을 쥐면서도 루카스는 자기 파괴의 함정에 쉽사리 빠져들지 않는다. 그리고 스승인 범피의 가르침대로 할렘의 흑인들에게 온정의 손길도 베푼다. 루카스는 범죄라는 영역에서 혁신을 통해 시장을 장악한, 뛰어난 사업가인 것이다.

미국 사회와 더불어 태어난 범죄자
그렇다고 해서 ‘아메리칸 갱스터’가 루카스를 바람직한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루카스가 파는 마약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파괴되는 가정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기본이다. 리들리 스콧은 루카스의 탁월한 장점을 과시하면서도, 루카스를 쫓는 리치 로버츠 형사를 통해 ‘아메리칸 갱스터’의 균형을 유지한다.

리치는 결코 영웅적인 인간이 아니다.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바람기 때문에 가정을 파탄 낸 리치는 원리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유형이다. 절대 뇌물을 받지 않고 수사 과정에서 발견한 100만 달러를 그대로 신고하는 청렴한 경찰이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 때문에 경찰 내에서는 ‘왕따’를 당하게 된다.

리치는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인물이다. 리치는 루카스의 본질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다. 루카스가 비범한 인간이며 나름대로 양심적인 범죄자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루카스를 쫓는 것에 대해 아무런 망설임도 없다. 어쨌거나 루카스가 범죄자라는 사실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으니까.

리들리 스콧은 ‘아메리칸 갱스터’ 프랭크 루카스의 일대기를 통해 매력적인 범죄자의 초상을 그려내는 동시에 미국 사회의 음영까지도 수려하게 잡아낸다. 프랭크 루카스는 영웅이 아니라, 미국 사회가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범죄자다. 리들리 스콧은 범죄의 스펙터클한 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범죄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일면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글래디에이터’ ‘블랙 호크 다운’ ‘매치스틱 맨’ ‘킹덤 오브 헤븐’ 등 리들리 스콧의 최근작은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대중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을 택한다. 리들리 스콧은 이제 대중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춘 거장인 것이다.


김봉석씨는 영화ㆍ만화ㆍ애니메이션ㆍ게임ㆍ음악 등 대중문화 전반을 투시하는 전방위 평론가로 ‘B딱하게 보기’를 무기로 한 ‘봉석 코드’의 달인입니다.



김봉석씨는 영화ㆍ만화ㆍ애니메이션ㆍ게임ㆍ음악 등 대중문화 전반을 투시하는 전방위 평론가로 ‘B딱하게 보기’를 무기로 한 ‘봉석 코드’의 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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