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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걷는문화가 교통지옥 이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때 정주영(鄭周永)씨가 걸어서 출근하는 모습은 TV 뉴스감이었다.노익장(老益壯)의 과시였던지는 모르지만 고령의 재벌총수가 두툼한 방한복 차림으로 뒤따르는 시민들과 말을 건네며 걷는모습은 건강한 거리의 풍경 그대로였다.우리나라에 서는 장관이 전철을 타면 뉴스지만 유럽에서는 각료나 시장이 거리에서 시민과어우러지는 것이 예사다.몇해전 스웨덴 총리가 퇴근길을 걷다 괴한에게 살해됐다.시민들은 총리를 경호원없이 걷게한 정부를 나무랐지만 재상(宰相)도 걷는 것이 선 진국이다.
미국의 현 법무장관인 리노여사도 걸어서 출근한다.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는 여장관은 걷기에 편한 실팍한 구두를 신고 있다.
한손에 든 것은 서류가방이지만 어깨엔 소쿠리만큼 큰 막가방을 메고 있다.그 속에는 사무실에서 갈아신을 뾰족구두 가 들어있으리라.세계의 수도라는 맨해튼의 중심가엔 멋쟁이도 많지만 숙녀들의 발엔 실용화가 신겨있다.걷기 위해서다.신사들도 비신.눈장화등 걸을 태세가 전천후다.서울처럼 1천만 인구가 비비고 사는 뉴욕에는 옐로캡(택시)과 서비스차량이 태반이고 개인 승용차는 아예 도심에 들어설 엄두를 안낸다.
서울의 남대문로-.이른 아침 인파를 헤치며 어김없이 걸어가는서양 외교관이 있다.가파른 지하도와 육교를 오르락 내리락 미로(迷路)같은 서울복판을 걷는 사람.그는 미국공보원장이다.을지로에 있던 USIS가 데모대에 밀려 삼각지로 이사 했기 때문에 멀리 걸어야한다.
스티븐 라운스 공보관도 걷는다.그는 안국동 관사에 살기 때문에 하루에 족히 20㎞는 걷는다.걷는것은 보행자의 건강과 개인적 즐거움 때문이겠으나,교통대란을 겪고있는 대도시에서는 그 초보적인 해법이 될수 있다.시민정신을 일깨우는 출발 점이기 때문이다.도덕성이다,세계화다 컨센서스는 쉬 이루면서 조그만 실천은뒷전인 것이 우리 현실이다.선진국형(型)인 심장병.당뇨병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주범으로 바뀌고 있다한다.잘먹고 걷지않기 때문일 것이다.일가일차(一家一車)로는 안되겠다 싶어 한집에 두세대씩 차가 늘것이라니 기가 차다.세계화로 가기위한 비자(入國査證)라지만 일본이나 미국대사관앞에 수백명씩 늘어선 장사진은 교통체증의 또다른 단면이다.
알고보니 이 문제도「이래도 탈,저래도 탈」에 속한다.오전 4시부터 줄을 서는「망국적 비자」행렬이라는 여론에 못이겨 美대사관은 요즘 순번 표딱지를 미리 나눠주는 제도로 바꿨다.그랬더니얌체들이 스티커를 여러장 타다가 암표마냥 한장에 10만원씩 받고 팔아넘기고 있어 가짜를 가려내느라 장사진 은 더욱 길어지고있다. 일본과 미국은 노비자 관계다.비자없이 드나드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일본인은 약속을 지키기 때문이다.그 위반율이 20%이하로 떨어지기 전에는 부끄러운 서울 거리의 장사진은 계속될 것이다.
교통난을 말할때 자동차가 많다,길이 좁다는 진단은 죽은 아이나이 세기다.왜 길에서 방황하는가를 물을때다.지금 왜 길에 나서있는가를-.동강난 성수대교의 일그러진 모습이 지구촌에 비춰지고 있을때 일본의 한 전문가에게 마이크를 들이대 자 그는『웬 사람이 저렇게 많이 몰려있느냐,위험하다』는 말부터 했다.망둥이가 뛰니까 빗자루도 뛴다고,왜 너도 나도 차를 몰고 나서는가 말이다.세계화를 위해 뛴다지만 하루 수백만 인구가 차에 갇혀 어떻게 뛴다는 건가.
연말연시나 명절 은「민족의 대이동기」라고 치고 왜 저리도 많은 사람이 거리에 나와있는가를 한 외국인이 물어왔을때 나는 한국인의「몸으로 때우는 문화를 들려준적이 있다.초청을 받지않았더라도 관가의 높은 문턱을 드나드는 일부터 유력자의 결혼식장에 서성거 리는 긴 대열에 이르기까지 몸으로 때워야하는 문화-.한번 만나 이뤄질 거래도 두번 세번 만나야 한다.한 통화면 끝날일도 얼굴을 맞대고 확인해야 한다.「찾아 뵈어야」할일과 「얼굴비쳐야」될일이 너무도 많다.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열번 몸으로 때우는 것보다 단 한번의 정밀한 자료 검색이 유효할 때도 있다.그 잘난 정보화통신시대는 아직도 열리지 않았는가.
재택(在宅)근무.안방극장.홈쇼핑과 화상(畵像)대화시대가 와도몸으로 때우는 문화는 그대로일건가.세계화를 위해 달린다 함은 달리지 못하는 차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일선에서 창조의 시간을 누가 더 많이 갖느냐의 싸움이 다.내년엔 길거리에 덜 나서자,그리고 걷자.그리고 몸으로 때우지 않아도 믿을수 있는 시민정신을 일으키자(10부제날 버스 타고 출근한 최병렬시장의 모습은 신선했다.가로등을 더 밝게하고 차도 못잖게 인도를 생각하는 행정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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