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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계서 빛난 '야망의 세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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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이명박의 인생 2막을 연 것은 1965년 현대건설 입사였다. 어린 시절 가난의 추억은 이명박에게 더 치열한 삶을 강요하는 촉매제이자 원동력이었다. 이런 치열함으로 그는 현대에서 27년을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화려한 '샐러리맨의 신화'를 등에 업고 시작한 정치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가 승부수로 던진 청계천 복원은 정치인 이명박이 터뜨린 역전 만루홈런이었다.

#1. 12년 만에 사장, 현대에서 샐러리맨의 신화를 쓰다

65년 대학 졸업 후 마땅한 취직자리가 없던 이명박의 탈출구는 조간신문에 난 1단짜리 구인광고였다. '해외 건설현장에 나가 일할 역군 모집'이었다. 이명박은 태국 공사현장에서 일할 사원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현대건설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1차 필기시험 뒤 '요주의 인물'로 찍혀 면접을 보지도 못하고 떨어질 위기에 몰렸다. 학생운동 경력이 이명박을 붙잡았다. 이명박은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써 운동권 학생의 사회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비판했다. 우여곡절 끝에 입사에 성공한 이명박은 인생의 멘토인 정주영과 운명적으로 대면한다. '태국 금고 사건'은 정주영의 뇌리에 이명박을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다.

66년 이명박은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태국으로 갔다. 금고를 노린 폭도들이 각목과 칼을 들고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폭도들의 발길질에 경리과 직원 이명박의 허리와 얼굴.옆구리에 불이 났고, 폭도들이 휘두른 단도가 목 옆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경찰차 사이렌이 울릴 때까지 이명박은 금고를 품에 안고 놓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이명박은 현대건설 내부에서 일약 스타가 됐다.

중장비를 관리하는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으로 근무했던 시절 이명박은 멀쩡한 불도저 한 대를 박살 낸 적도 있다. 부품 하나하나를 모두 뜯어 완전히 해체해 놓고 다시 매뉴얼 북을 펴놓고 조립한 것이다. "병신 같은 놈들…담당이 어떤 놈이기에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 투입될 멀쩡한 불도저를 뜯은 거야?"라는 정주영의 불호령이 떨어졌지만 이명박은 정비공들을 장악하기 위해 스스로 불도저를 마스터한 것이다.

그는 이런 추진력으로 5년 만에 이사, 10년 만에 부사장, 12년 만에 사장, 23년 만에 회장이 됐다. 이명박은 현대건설 사장 시절 간염에 걸려 한남동 순천향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친구들이 문병을 갔지만 보여야 할 환자는 없었다. 낮시간대엔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한 뒤에만 치료를 받는 이명박의 '출퇴근 입원' 때문이었다. 정주영이 미진한 보고서에 호통을 칠 때마다 다른 간부들은 "좀 더 연구해 보겠습니다"고 했지만, 이명박의 대답은 "내일 아침까지 보고드리겠습니다"였다. 작지만 의미 있는 차이들이 쌓여 샐러리맨의 신화가 됐다.

#2. 정주영과의 결별… 정치적 영광과 좌절

부자관계와도 같던 정주영과 이명박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 최근 이명박은 한 저서에서 "드라마를 둘러싼 갈등 때문에 정 회장과 나의 30년 인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고 회고했다.

이명박의 성공을 주제로 한 드라마 '야망의 세월'이 방영되던 시절 정주영은 KBS 행사에 참석해 자신의 역을 맡고 있는 탤런트에게 화를 냈다. "중소기업 사장도 그렇게는 안 해!"라며 호통을 친 것이다. 정주영은 드라마가 자신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명박이 담당 작가를 만나 "나 대신 정주영 회장을 부각시켜 달라"고 설득하는 일도 있었다.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건 정치적 노선 차이였다. 정주영이 국민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지만 이명박은 여당인 민자당 전국구 의원의 길을 선택했다. 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이명박은 4선 의원 이종찬, 청문회 스타 노무현과 맞붙어 종로에서 승리한다. 그는 종로구 숭인1동 유세에서 "여러분은 정치에 관심을 끊고 아이들 장가보낼 생각이나 하시라. 평창동 부자들도 정치에 관심을 끊는데 왜 당신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느냐. 난 여러분 잘살게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다. 잘살려면 날 찍으시라"고 연설했다. 하지만 오만해 보이는 연설이 오히려 주민들의 경계심을 풀어 몰표로 이어졌다.

하지만 종로의 승리는 이명박에게 독이 됐다. 선거자금 과다 지출이란 선거법 위반의 책임을 지고 이명박은 98년 정계를 떠났다. 서울시장 출마의 꿈은 날아갔고, 이명박은 의원직을 내던졌다. 이 사건은 2007년 대선 때까지 이명박의 발목을 잡았다. 이명박은 "내 인생 최대의 실수로 깊이 뉘우치고 있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3. 와신상담(臥薪嘗膽)… 재도약의 발판이 된 청계천

정계를 떠난 이명박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워싱턴의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1년간 연수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이명박은 다시 칼을 갈았다. 어린 시절의 가난 체험을 자청했다. 워싱턴 근교의 좁은 아파트에서 가구 없이 빈 박스를 엎어 그 위에 전화기를 올려 놓고 살았다. 금욕에 가까운 생활이었다. 어느 더운 여름 이명박 가족은 미국 서부의 휴화산을 보러 여행을 떠났다. 이명박은 "쓸데없는 돈을 낭비할 수 없다"고 우겨 일가족 6명이 렌터카 한 대를 타고 고속도로를 열 시간 이상 달렸다. 모두들 돌아가자고 했지만 이명박의 고집 때문에 결국 모두가 화산을 보고 난 뒤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2000년 초 미국 생활을 정리한 그는 서울로 돌아와 BBK 대표 김경준씨와 동업해 인터넷 금융회사를 차리기도 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2002년 이명박은 95, 98년에 이은 세 번째 도전에서 꿈에 그리던 서울시장직에 오른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렸던 청계천 복원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웠고, 결국 실현시켰다. 대중교통 시스템 개조, 뚝섬 서울의 숲 완성, 서울시청 광장 조성, 뉴타운 사업, 예산 절감 등 이명박이 '서울의 신화'라고 부르는 4년간의 업적은 대통령 도전의 결정적 토대가 됐다. 이명박의 이름 앞에 붙는 '실천하는'과 '일하는'의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게 됐다.

그는 '불도저'다. 하지만 이명박은 이 말을 싫어한다. 치밀한 계산과 고민 끝에 정책 방향이 정해진 뒤에야 밀어붙이는 '컴도저(컴퓨터+불도저)'라고 주장한다. 청계천 복원 때 이명박과 서울시청 상인대책팀은 청계천 주변 상인들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무려 4200번을 설득했다. 무조건 밀어붙이기식이 아닌 치밀한 계산법에 따르는 게 이명박식 일처리라는 것이다. 2006년 6월 서울시장에서 퇴임한 이명박은 '한반도 대운하' 등을 내걸며 경쟁자들보다 한 발 빨리 움직였다.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 뒤 이명박은 여론조사 지지율 1위로 올라섰고, 이후 15개월 동안 한 번 잡은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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