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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장 앞에 길게 줄을 선 이유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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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서울 목3동 주민센터에 설치된 대선 투표소. 40~60대 중노년층 유권자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한때 많게는 50여 명이 30m가 넘는 긴 줄을 섰다.

은행에 다니다 지난해 은퇴한 한동석(56.목3동)씨는 상고 출신이지만 지점장까지 올랐다. 부지런한 그는 이날도 일찍 일어났다. "일이 있어 출근한다"는 딸(26)을 "직장까지 태워주겠다"고 설득해 투표소로 데려왔다. 부인 원효숙(55)씨도 "투표해야 바뀌지"라며 거들었다. 한씨는 지난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을 뽑았다. 그땐 딸이 적극적이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 참신한 인물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에 기대를 걸었다. 같은 상고 출신으로 변호사까지 된 노무현 후보가 미더웠다. '희망 돼지저금통'같이 '자발적 정치 참여'의 중심에 선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 집권 5년 동안 기대는 반감으로 바뀌었다. 한씨는 "경험도 융통성도 없는 386세대들이 아마추어적으로 일을 처리했다"며 "결국 나아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번에는 한씨가 한 달 동안 딸을 설득했다. "또 고생하지 말고, 프로를 뽑자"고.

중산층이 많이 사는 목3동처럼 오전에는 투표소에 중노년층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노무현 정부를 혼내고 싶다"는 얘기를 거침없이 했다. 서울 봉천2동 투표소에서 만난 김진섭(62)씨는 다섯 살 때 함경도에서 피란 내려와 전북 군산에 정착해 오래 살았다. 보수 후보를 찍은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막말하고, 자기 멋대로 하고, 코드 인사 하는 사람은 안 된다"며 "그래서 이번엔 바꿨다"고 말했다.

오후에 들어서자 20~30대의 젊은 층이 투표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5년 전 대선판은 젊음으로 뜨거웠다. 김흥록(27.서울 염리동)씨는 "지난 대선에선 두 개의 엔진이 젊은이들을 움직였다"고 말했다. 반미감정을 자극한 효순.미선 사건과 '노사모'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여론 형성이 그것이다. 두 엔진을 통해 하나로 뭉친 젊은이들은 노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 원동력이 됐다. 정몽준 의원이 투표 전날 밤 후보 단일화를 철회했을 때 이들의 휴대전화에는 문자메시지가 폭주했다. 너나없이 자발적으로 투표를 권유해 위기의 노무현 후보를 구해낸 것이다.

그러나 5년 뒤 2030세대는 분노하고 있었다. 서울 개봉2동 투표소인 영평교회에서 만난 송주희(23.여)씨는 "1년 가까이 취업 준비를 하면서 살갗에 와 닿는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며 "설익고 구호뿐인 통일이나 진보 개혁보다 실업 해소와 취업에 젊은이들은 목말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부천시 범박동 일신중학교에서 투표를 마친 강명숙(35)씨는 "터무니없이 오른 서울 아파트 값을 보면 속이 터진다"며 "양극화 해소를 떠벌리던 정부가 오히려 빈부격차를 더 벌려놨다"고 비판했다. 강씨는 "집 평수를 늘리는 것은 고사하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 가는 꿈마저 버렸다. 없는 사람들은 희망도 포기했다"고 덧붙였다.

실제 투표소에서 나오는 유권자들에게 "누구를 찍었느냐"고 물으면 이명박 후보를 찍은 사람들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반면 다른 후보를 찍은 사람들은 대답 없이 슬그머니 투표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었다. 지지 후보가 당선된다는 확신이 없지만 이 후보를 경계하기 위해 투표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강남에서 투표를 마친 뒤 서울 인사동에 나들이 나온 주부 김근식(56)씨는 "딸이 셋 있는데, 지난 대선에선 모두 적극적으로 노 대통령을 찍었다. 그런데 이번엔 도통 투표할 생각들을 안 한다"며 "과거의 쓴 경험 때문에 자신감을 잃은 것 같다"고 말했다.

2007년 12월 19일, 유권자는 정권 교체를 선택했다.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표로 응징.심판한 것이다. 투표 결과 분석에선 5년 전 노 대통령을 지지했던 유권자 중 상당수가 이명박 후보로 이탈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명박 당선자도 되새겨 볼 대목이다.

강인식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