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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의 소곤소곤 연예가] 이유있는 지각대장 박준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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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면

한 주의 피로를 풀어주는 프로그램, '개그콘서트'. 그러기 위해서 개그맨들은 일주일을 꼬박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밥먹듯, 아니 끼니보다 더 자주 연습을 챙기는 그들에게 얼마 전부터 재미있는 규칙이 하나 생겼다. 바로 '번호표 발급'. 연습시간에 일분이라도 늦으면 현관에 미리 대기 중인 막내 개그맨이 선후배 가릴 것 없이 지각하는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나누어준다.

그리고 공연보다 더 긴장되는 아이디어 회의와 피 튀기는 연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될 때쯤, 이 지각생들의 번호표 추첨이 이어지는데…일명, '공포의 로또'!! 이때 걸린 사람이 그날의 개콘 식구들 간식을 몽땅 책임져야 한다. 오직 당첨은 단 1명. 메뉴에 따라 가격도 천지차이인데 시원하게 목 축이는 아이스크림은 3만원 정도, 그러나 유난히 허기진 날에는 무려 28만원어치의 피자가 배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지각대장'이 있었으니…. 바로, 용감무쌍한(?) 개그맨 '갈갈이' 박준형!

그런데, 소문난 짠돌이 박준형이 어떻게 벌금을 쉽게 낼 수 있을까?

얼마 전 그는 회사를 설립했다. 공연과 영화를 위해 동료 몇몇과 뜻을 모았는데, CEO(대표이사)라는 직함을 맡게 되자 주변에서 부추김이 많아졌단다. "사장님께서 쏘시죠." 그러면 마치 마법에 걸린 듯, 기분 좋게 지갑이 열린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코 자만하지 않게 하는 유난히 어려웠던 유년의 기억이 있다는데….

10여 년 전, 박준형은 방위로 근무하던 군 복무시절 힘겨운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남모르게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오후 5시에 퇴근을 하면 곧장 리어카를 끌고 영등포 한복판에서 노점상을 하고, 밤 12시부터 동네 주유소에서 꼬박 밤을 보냈다. 당시 그가 선택한 길거리 사업 아이템은 바로 불법음반 테이프.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장사도 쏠쏠히 잘되던 그때. 엄청난 제의가 들어온다.

"여기에 있는 테이프 몽땅 다 주세요."

"네? 정말요?"

"대신, 리어카도 파시오."

그 사람은 바로 박준형의 리어카 건너편에 있는 레코드 가게 주인이었던 것. 젊은 사람이 너무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임대 가게의 매출에 지대한 타격을 받자 어쩔 수 없이 그를 찾아왔다고. 박준형은 너무도 정중한 제안에 2년 동안 지켰던 자리를 아쉬움 없이 포기했다.

이렇게 거리에서 인생을 배우고, 눈물 젖은 빵 맛을 아는 그였기에, 오늘의 그가 존재하리라. 그렇다면 박준형은 연습시간에 왜 자꾸 늦을까? '개그콘서트'는 물론 '좋은나라 운동본부'(KBS) MC에 새벽 2시에 끝나는 라디오 생방송 진행, 영화촬영, 갈갈이 패밀리 음반녹음까지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눈코 뜰 새 없다는 것이 즐거운 변명이다.

이 시대 최고의 개그맨 박준형! 누구보다 바쁘게 인생을 부지런히 사는 그이기에, 연습시간만큼은 가장 '행복한 지각생'이다.

이현주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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