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아이

바보에서 천재가 된 버락 오바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초선인 오바마는 한 달 전까진 ‘바보’나 다름없었다. 힐러리 클린턴(60) 상원의원에 대한 그의 도전은 무모해 보였다. 그는 전국에서 힐러리 지지율의 절반밖에 얻지 못했고, 내년 1월 3일 시작되는 경선 초기 지역에서도 고전했다. 사상 첫 흑인 대통령의 등장은 시기상조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난 한 달간 놀랄 만한 민심의 변화가 일어났다. 힐러리는 지지율 하락의 사이클에 걸린 반면 오바마의 지지율은 치솟았다. 특히 아이오와·뉴햄프셔·사우스캐롤라이나 등 후보들의 부침에 큰 영향을 미칠 초기 경선 지역에서 오바마는 힐러리를 추월했거나 박빙의 차이로 선두를 다투고 있다. 힐러리에겐 떼어 논 당상처럼 보였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직은 누가 차지할지 짐작하기 어렵게 됐다. 왜 이런 반전이 일어났을까.

 우선 힐러리의 실책을 들 수 있다. 그는 높은 지지율에 도취한 탓인지 안이해 보였다. 노련미와 경험을 무기로 내세웠던 그는 경륜과 혜안을 보여주지 못했다. 핵개발을 이유로 이란을 압박하는 부시 행정부가 이란 혁명수비대를 테러 집단으로 지정했을 때 그는 찬성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란 핵 프로그램은 2003년 가을 중단됐다는 미 정보기관의 보고서가 나오자 힐러리의 판단력은 도마에 올랐다. 뉴욕주가 추진하다 포기한 불법 체류자에 대한 운전면허증 발급 문제와 관련, 힐러리는 처음엔 찬성했다가 비판론이 일자 반대로 돌아섰다. 이런 그의 행보는 “역시 계산적”이라는 인상을 남겼고, 경험과 판단력은 별개의 문제라는 걸 새삼 일깨웠다.

 반면 오바마는 경험 부족의 문제를 ‘변화의 기수’라는 장점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경험 부족이란 워싱턴의 당파적 기성정치에 물들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고 말한다. “이라크전을 주도한 딕 체니 부통령이나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이 쌓은 경험은 나라엔 독이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미국에 필요한 건 지도자의 바른 통찰력”이라며 자신은 이라크전을 찬성한 힐러리와 달리 처음부터 반대했다고 강조한다.

 힐러리 진영에서 “오바마는 이슬람 교도”라고 하거나 “한때 마약을 했다”고 공격했을 때 오바마는 “피의 스포츠(a blood sport)를 닮은 정치에 국민은 관심이 없다”며 어른스럽게 받아넘겼다. 그런 그를 다수 대중은 신뢰하기 시작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모든 후보가 ‘변화’를 외치지만 대중은 오바마의 주장에 매력을 느낀다”고 보도했다.

 올 2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 오바마는 미숙함을 여러 번 노출했다. TV토론에서 ‘미국이 테러 공격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정보가 정확한지 확인하고 나서 판단하겠다”고 했다가 ‘안이하고 나약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이런 실수 때문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변화와 통합’이라는 자신의 핵심 가치는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공약을 구체화하면서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선거는 그를 단련시켰고, 성장시켰다. 만일 그가 힐러리를 두려워해 출마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장래가 유망한 상원의원 중 한 명쯤으로 대접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대선 지형을 흔드는 거인으로 부상했다. 선거를 통해 오바마 같은 좋은 인재를 발굴할 수 있다면 그건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2008 미국 대선 관련 기사 목록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