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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민기자의가정만세] 손자 돌보기, 자부심 갖게 해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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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네 살배기 손녀를 3년째 돌보고 있는 60대 K할머니. 그러나 그가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위해 아이를 본다는 사실은 비밀이다. “손주 키운다고 하면 하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서 귀찮아요. ‘이제부터 인생을 신나게 즐겨야지 정신 나갔느냐’고 하든가 아니면 ‘개 키운 공은 있어도 손주 기른 공은 없다더라’고 뜯어말리지요.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건데….”

 K할머니도 처음부터 손녀를 봐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육아도우미를 여러 번 바꾸는 등 아들 부부가 고생하는 과정을 지켜보다 마음이 약해졌다. 며느리와 육아 문제로 갈등이 생기거나 몸이 아플 때는 솔직히 회의도 들었다. 그러나 나날이 커가는 손녀와 생활을 같이하다 보니 절로 젊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외로울 새가 없어 좋았다. “곧 고령화 사회가 되면 노인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는데, 손주 돌보기를 제2의 직업으로 삼으면 상당 부분 해결이 되지 않을까요?”

 맞벌이 부부의 육아 문제를 무조건 노인들에게 떠넘기는 건 옳지 않다. 자식 결혼시키고 이제 숨 좀 돌리려는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아이가 정서적으로 엄마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가 0∼3세(최소한 2세까지라도)라고 한다. 이때 여성이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나, 그에 필요한 재원을 조성하는 일은 국가와 사회, 기업의 몫이다. 스웨덴 등 선진국처럼 질 좋고 값 싼 공보육기관을 늘려가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실은 당위와 한참 떨어져 있다. 그 사이 일도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는 젊은 부부들은 육아 도우미 물색과 높은 비용 부담에 허덕이고 있다. 지금이 선진사회로 가는 과도기라고 할 때, 노인들에게 과도기의 다리 역할을 기대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무엇보다 아이 중심에서 생각한다면, 일하는 부모의 빈 자리를 채워줄 적임자는 무조건적 사랑을 베푸는 조부모일 것이다.

 조부모들이 손자·손녀를 떳떳이 돌볼 수 있으려면 의식이 달라져야 한다. K할머니의 주변 사람들처럼 아이 보는 노인을 ‘불쌍하다’ ‘정신 나갔다’라고 여기는 시선부터 없어져야 한다. 12월 17일자 본지 Family면에 실린 ‘노란 손자똥 이렇게 반가울 수가…’의 주인공 박복남씨. 2년 전 그가 함께 골프를 치러 다니던 사람들에게 손자를 키우겠다는 결심을 알리자 반응은 이랬다. “손자 키우느라 2년씩이나 필드에 못 나간다니, 말도 안 된다.” 그러나 그의 보람찬 육아담이 기사화되고 나서는 “(노년에) 이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다면 다시 생각해볼 일”이라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젊은이들도 노인들에 대해 행여 ‘할 일 없는데 아이나 봐주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손자 돌보기’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어엿한 직업으로 가꿔가는 데는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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