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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205.6共 권력재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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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전두환(全斗煥)前대통령이 백담사로 향하던 그순간부터 청와대는5共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한 국면전환책 마련에 돌입했다.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 현대판 귀양살이를 떠나는 全前대통령의 對국민사과를 청와대에서 TV로 지켜봤다.5共청산의 주역이었던 홍성철(洪性澈)비서실장.최병렬(崔秉烈)정무수석.박철언(朴哲彦)정책보좌관과 함께.기자회견을 지켜보던 盧대통령의 눈가에는눈물이 맺혔다고 한다.崔정무수석은「국면전환을 위한 개각」을 건의하고 사표를 냈다.
개각은 예정돼 있었다.9월에 만들어진 5共청산 비밀보고서는 이미 그때부터 全前대통령의 항복선언을 분수령으로「민정당 당직을개편하고 내각을 교체해 6공화국 집권초기를 결산하고 새로운 정국상황에 대처해야한다」며 개각과 당직개편을 강조 했다.
盧대통령은 全前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난 3일후인 26일 전국에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지난 시절을 참회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뉘우침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전임대통령의 사죄를 너그러이 받아주십시오』라며「사면」을 호소했다.그리고 9일뒤 개 각을 단행했고,다시 3일뒤 당직을 개편했다.악몽을 떨쳐버리려는듯 여권수뇌부를 완전히 새롭게 물갈이한 것이다.
규모면에서 개각은 파격적이지 않을 수 없어 총리까지 포함해 25명중 21명이 갈렸다.내면을 보면 더 파격적이었다.6共은 출범 당시 첫 내각을 구성하는 조각(組閣)에서「정책의 일관성을유지해야 한다」는 全前대통령의 주장에 따라 울며 겨자먹기식으로중요한 장관은 모두 5共 장관을 그대로 유임시켰다.내각의 얼굴인 총리는 바꿨지만 업무의 중요성에 따른 서열상 2위 경제기획원장관(羅雄培),3위 외무부장관(崔侊洙),4위 내무부장관(李相熙),5위 재무부장관(司空壹),6 위 법무부장관(丁海昌)등 알짜배기 7개 부서는 5共장관이 그대로 유임된 상태였던 것.
그런데 이번에는 내각을 손질하는 개각(改閣)임에도 총리와 기획원장관을 포함해 조각때 바꾸지않았던 주요장관까지 모두 바꿨다.안바뀐 장관은 동자부.총무처등 상대적으로 서열이 떨어지는 곳뿐이었다.정권보위의 선봉장인 안기부장도 율사출신 으로「유약하다」고 평가된 배명인(裵命仁)씨 대신 대통령의 육사 1년 후배인박세직(朴世直)씨로 바꿨다.7개월만의 경질로 裵부장은 당시 최단명 안기부장으로 기록됐다.
사실상 정권출범때 5共의 그늘에 가려 못했던 조각을 뒤늦게 한 셈이다.이때문에「노태우 사람들」의 전진배치를「사실상 6共의출발」이라고 보는 시각도 많았다.
행정부의 얼굴인 강영훈(姜英勳)국무총리는 5.16 당시 육사교장.그는 육사생도들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에 반대하다 군복을 벗었다.당시 육사후배들의 행진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전두환대위.
姜씨는 도미유학후 학자로 변신했다.그리고 아이로 니컬하게도 육사생도행진을 이끈 全前대통령에 의해 외교관으로 발탁돼 영국대사와 바티칸대사등을 역임한 뒤였다.
그를 더욱 높이 평가해온 사람은 盧대통령이었다.盧대통령은 그를 전국구 4번으로 정치권에 영입했을뿐 아니라 당대표나 총리감으로 중용할 생각이었다.盧대통령은 개각 며칠전 그를 청와대로 따로 불러 조찬을 함께 하면서『당을 맡아달라』고 당대표직을 제안했다. 姜씨가「정치를 모른다」며 난색을 표명하자 盧대통령은『그럼 총리를 맡아달라』고 간청했다.姜씨가『외국에 오래 나가있어국내사정에 어둡다』고 역시 난색을 보이자 盧대통령은『누가 처음부터 총리공부한 사람 있습니까』라며 총리직을 떠맡기다시 피 했다. 대신 당을 맡을 사람은 盧대통령의 경북고 7년 선배인 박준규(朴浚圭)의원을 내정해놓고 있었다.그는 대구 갑부의 아들로서울대 강단(그는 정치학교수였다)과 선거판(국회의원출마)을 몇차례 오가며 낙선의 고배를 마시다 4.19직후 선거 에서 당선돼 집권 민주당의원으로 정계에 투신했다.그러다 5.16후에는 집권 공화당으로 옮겨 당의장까지 지내는등 화려한 정치경력을 쌓은 구정치인.
87년 대통령선거 막판에 같은 경북고 선배이자 큰 매부인 백남억(白南檍)前공화당의장등의「TK단결論」에 따라 YS지지에서 노태우지지로 돌아선 공도 있었다.그 인연으로 3공화국의 TK세력과 6공화국의 TK세력을 연결하는 징검다리이자 6共 TK의 맏형이 된 것이다.
***崔수석 껄끄러워 더욱 주목할 대목은 정부와 민정당의 얼굴보다 실질적인 영향력이 더 큰 청와대 진용의 변화다.이는 여권 핵심내부의 세력변화를 반영한다.청와대 수석중에서도 알짜배기인 정무수석과 경제수석이 바뀌었다.그리고 정치담당 특별보좌관이라는 장관 급 자리가 새로 생겼다.보통 수석은 차관급이며,비서실장이 장관급이다.
먼저 수석비서관 서열1위인 정무수석은 최병렬수석에서 최창윤(崔昌潤)수석으로 바뀌었다.최병렬수석은 全前대통령의 백담사행을 주도한 인물로「두분(全.盧 두대통령)간의 40년 우정에 금이 가게했다」는등의 자책론에 따라 사표를 제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崔수석의 사퇴는 여러모로 여권핵심 권력변화의 가늠자와같다. 청와대관계자 Z씨는 이를 박철언보좌관과의 갈등으로 해석했다.그는 『당시 청와대를 움직인 사람은 崔수석과 朴보좌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6共초반만 해도 서울대법대 선.후배인 두사람간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죠.그런데 대통령의 총 애를 받던 두 사람인데다 서로 성격이 강하다보니 충돌하는 일이 적지않았습니다.만약 朴보좌관이 崔수석의 사퇴에 반대했다면 정무수석은 바뀌지 않았을겁니다.그런데 朴보좌관은 선배이자 자기 주장이강한 崔수석을 껄끄러워했죠』라고 분석했다 .
냉정히 말해 충성경쟁과 파워게임에서 崔수석이 朴보좌관에게 밀렸다는 해석이다.Z씨는 또 후임인물의 성격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그는『최창윤수석은 박철언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임 崔수석은 5共청와대의 정무비서관으로 朴보좌관 과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있죠.간단히 말해 朴보좌관은 자신의 국내정치 간여를 배제하려던 껄끄러운 학교선배 최병렬정무수석(국내정치는 정무수석담당)대신 자신과 뜻이 맞을 수 있는 부드러운 남자 최창윤씨를 앉힌 셈입니다』고 해석했다.
***공조직 세력 퇴조 최병렬수석의 경질은 개인적 차원을 떠나 이춘구(李春九)내무장관의 사퇴와 함께 여권내 권력재편으로 확대해석될 수 있다.
崔수석과 李장관은 6共권력의 한 기둥을 형성하는 취임준비위 멤버들이었기 때문이다.이들은 동시에 권력재창출 과정에 서 공조직을 장악했던 공신세력이다.이들의 반대편에 서있는 또다른 6共의 기둥은 사조직(월계수회)을 장악했던 세력,즉 박철언보좌관 진영이다.따라서 崔수석과 李장관의 동시퇴진은 취임준비위 세력의퇴진과 사조직세력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 기도 했다.
물론 李장관도 자진사퇴한 경우다.李장관은 정기국회중이던 11월말 청와대로 올라가 盧대통령을 독대해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장관실로 돌아와 한참동안 줄담배만 피우던 李장관은 곧바로 고려병원에 입원,병중을 이유로 대통령의 부름에도 응하 지 않았다.
李장관 본인은 심신피로를 사퇴이유로 주장했으나 그와 가까운 한관계자는『병은 핑계고 실제로는 독대하면서 박철언보좌관을 성토하고 그의 사퇴를 주장했는데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표를 던진것입니다』고 말했다.
당연히 이후 朴보좌관의 영향력은 국내정치분야에까지 거칠 것이없었다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황태자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한참후의 얘기지만 황태자는 3당 통합후 김영삼(金泳三)대표와의 헤게모니 싸움 과정에서 金대표쪽에 선 취임준비위세력에 포위공격받아 몰락한다.김영삼정부하에서 6共 취임준비위멤버였던 이춘구의원이 국회부의장,최병렬前의원이 서울시장으로 건 재하고 있는반면 박철언의원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던 것도 이같은 흐름과 무관치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같아 흥미롭다.
한편 정치특보라는 장관급 자리가 노재봉(盧在鳳)서울대교수를 위해 위인설관(爲人設官)된 점도 주목할만한 파격이다.盧교수와 盧대통령 사이에는 엉뚱하게도 5,6共간의 밀사 이원조(李源祚)前의원의 역할이 끼어있다.
***정치특보 新設도 6共관계자 Y씨는『盧대통령과 절친한 李씨는 가끔 돈얘기 말고 정치적 아이디어도 건의해야겠다는 생각을갖고 있었습니다.그런 아이디어를 스스로 가지고 있지못했던 李씨는 대신 당시 언론에 칼럼을 쓰던 盧교수에게 아이디어를 빌리곤했죠. 盧대통령이 민정당대표시절부터 가끔 李씨가 盧교수의 리포트를 가지고와 건의하곤 하더니만 마침내 집권하자 장관급 정치참모로 추천한거죠』라고 말했다.Y씨는 또 『원로 정치인 이철승(李哲承)씨와 盧교수의 스승인 이용희(李用熙)교수도 그의 후원자』라고 덧붙였다.
보수우익적 소신파에다 내각제론자인 盧교수는 이미 70년대 중반 양金씨와 함께 야당의 40대 기수중 한사람이었던 이철승씨에게「중도통합론」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인연이 있으며,선거중 盧후보를 측면지원했던 李씨는 6共의 정치자문에 응 하곤 했다는것이다.정치학계의 원로인 이용희교수 역시 한때 6共 초대 국무총리로 내정될 정도로 6共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인물이며,盧교수는 그의 수제자라는 것.盧교수의 제자출신으로 盧대통령의 수족과 같았던 이병기(李丙琪)의전비서관 도 두 盧씨의 가교역을 맡아 대통령을 대신한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를 갖추었다.
보수우익적인데다 내각제론자인 盧교수의 장관급 정치특보 임명은이미 盧대통령의 6共 중반구상을 예고해주고 있었다.
뒷날 盧교수는 보-혁(保-革)구도와 내각제 개헌이라는 정계재편의 그랜드디자인을 주창하며 이는 박철언보좌관의 야심과 어 울려 공안정국과 3黨 통합,그리고 내각제 각서로 현실화된다.
그러나 당시 현실은 청와대의 구상,보다 정확히 말해「희망」과는 반대로 진행되고 있었다.백담사행으로 일단락된줄 알았던 5共청산문제는 열기를 더해가는 청문회와 함께 여전히 정가를 맴돌고있었으며,참회의 나날을 보내야 할 백담사는 오히 려 6共을 향한 포한(抱恨)의 세월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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