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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칼럼>애정어린 한국의 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인생은 도박」이란 말이 있다.그 경구를 흉내낸 것인지는 알수 없으나 영국의 등반가 크리스 보닝턴은 『등반은 도박이다』고말한 바 있다.
알프스나 히말라야 등지의 고산에서는 목숨을 건 극한등반이 흔히 시도된다.그런 등반은 사실 도박의 속성을 띠고 있다.
8천m급 고산의 최종 정상등반에 나서는 산사람은 대개 7천5백m 지점에 설치되는 마지막 캠프를 떠나 그날 안으로 등정을 마치고 되돌아와야 한다.
만약 최종 캠프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산소가 희박한 죽음의 지대에서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는 영원히 불귀의 객이되고 말 것이다.
목숨을 건 도박으로서의 등반은 이런 경우에 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의 「하얀 산」에서 매순간의 선택과 배팅으로 전개된다.
기압은 떨어지고 산소는 더욱 희박해져 정상적인 사고력을 잃게된다.며칠 굶어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그럼에도 정상까지는 칼날같은 설릉으로 2백m쯤 남아 있다.눈처마를 인 설릉은그 아래쪽으로 2천m의 절벽을 숨겨놓고 있다.
제트기류 속의 광풍은 등반의지마저 허공으로 날려보내고 있다.
게다가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하여 시간이 없다….이런 상황이라면 당신은 어떤 판단을,아니 어느쪽에 당신의 목숨을 배팅하겠는가. 정상까지는 불과 1시간 거리다.그러나 그후 「삶의 지대」로 무사히 내려선다는 아무런 보장이 없다.여기서 돌아서면 그래도 살아날 수는 있다.그 대신 정상은 없다.하지만 산에서의 정상이란,또 인생의 정상이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런 기로에 서서 삶의 모든 가치와 믿음을 회의하는 산사람이있다면 그는 분명히 제 목숨을 배팅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도박꾼이다.
하지만 한국의 산 속에서 만나게 되는 갈림길에서 도박꾼이 되는 산사람은 없다.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더러 우회하거나 길을 잃어 조금 더 고생하게 되는 정도의 차이를 가져올 뿐이다.그래서 한국산에서는 잘못 판단하여 길을 잃은 산 행이 더 좋은 추억거리와 재미를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런 한국의 산은 그 산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에게 언제나 뒤돌아보게 만든다.올라본 산에서는 올라보지 않은 공간 속의 산과는 달리 자신의 애정어린 시간의 체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그렇게 하여 들어가 본 산은 그 산으로 들어왔다가 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음으로 인해,그 사람이 제 이름마저 그 전과는 다른 정감으로 부르게 만든다.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은 다음날 아침 낯선 사람이 제 여인으로깨어나듯 한번 올라본 산을 끝내 잊지 못하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인연으로 묶여진다는 뜻에서 한국인의 산행은 도박이 아니라강한 에로티시즘을 지니는 사랑의 행위다.
〈산 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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