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드라마·영화로 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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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브라운관으로, 스크린으로 나들이를 한다. '수퍼맨' '스파이더맨' 같은 초인적인 영웅만화들을 잊을 만하면 영화로 만들어내는 할리우드만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화제가 됐던 한국 영화 '올드보이'의 원작이 만화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

물론 이 경우는 일본 만화였지만 최근에는 국내 작가들의 만화가 드라마.영화화 판권 계약을 속속 맺어 관객을 만날 날을 손꼽고 있다. 이는 만화뿐 아니라 정통문학이든, 인터넷소설이든 장르를 불문하고 독특한 소재와 자유로운 상상력이 보인다 싶으면 무조건 '찜'을 하는 영상문화의 탐식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판매 부진을 겪고 있는 만화계로서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최근 판권 계약을 한 작품으로는 박소희씨의 '궁'이 대표적이다. '궁'은 우리나라가 입헌군주국이라는 가상의 무대를 설정하고 조선왕조의 왕세자가 평범한 여고생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독특한 로맨스물이다. 아직 20대인 박씨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대한민국 만화대상에서 신인상과 인기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흥미로운 설정 덕분에 지난해 연재가 시작된 이후 완간도 되기 전에 10여곳의 제작사가 구매 경합을 벌였고, 이 중 '보디가드''앞집 여자'등 히트 드라마를 만든 에이트픽스(대표 송병준)가 드라마와 영화화 계약을 동시에 따냈다.

이제 각색 등 본격적인 제작 준비를 시작하는'궁'보다 한 발 앞선 행보를 보이는 것이 중견작가 원수연씨의 '풀하우스'다. 어려움에 처한 미모의 상속녀가 교통사고를 낸 사고뭉치 배우와 위장 약혼을 했다가 실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지난해 애장판이 다시 나왔을 정도로 순정만화계의 1990년대 작품 가운데 스테디셀러로 꼽힌다. 김종학 프로덕션(대표 김종학)이 지난해 판권을 사들여 올 하반기 방송을 목표로 현재 캐스팅 작업을 진행 중이다. 연출은 '거짓말''푸른 안개'등을 만들었던 표민수 PD가, 대본은 인터넷소설'옥탑방 고양이'의 극본을 쓴 민효정 작가가 맡는다.

이처럼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삼는 경우 원작의 재미 외에도 만화 독자들의 관심을 고스란히 드라마.영화로 옮겨올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풀하우스'의 경우 제작사 측이 처음부터 드라마로 만들 만한 만화를 찾아 나섰다가 선택한 작품이다. 김종학 프로덕션 관계자는 "중국이나 대만에도 번역 출간돼 있어 드라마로 만들면 공동 제작이나 수출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했다"면서 "연기자들도 젊은 여성은 대부분 이 만화를 읽고 자란 세대여서 호감이 높다"고 설명했다.

물론 대중적 인기를 누린 작품이라고 무조건 드라마.영화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에이트픽스 관계자는 "만화가 재미있어도 영상으로 옮기기에 안 맞는 작품이 많다"면서 "'궁'의 경우 갈등구조가 뚜렷하고,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집중돼 있어 드라마로 만들기 좋은 점이 처음부터 눈길을 끌었다"고 밝혔다. 영화사 LJ필름의 이승재 대표도 "사실 만화 중에 영상으로 옮길 수 있는 작품이 흔하지는 않다"면서 "너무 만화적인 작품, 즉 비현실성이 강한 작품은 영화에 적합지 않다"고 말했다. LJ필름은 강경옥씨의 만화'두 사람이다'를 영화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이다'는 대대로 살인을 저지르도록 저주 받은 집안에서 자란 여고생이 이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국내 만화에서 보기 드문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점이 영화 관계자들의 관심을 부추겼다. 이승재 대표는 "연재 초기에 일찌감치 판권을 사고 나니 나중에 여러 감독들이 영화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 밖에도 인터넷에 연재 중 최근 출간된 강도영씨의 '순정만화'가 신생 제작사 렛츠필름과 영화화 계약을 했고, 태평양전쟁이 소재인 이현세씨의 만화'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는 '번지점프를 하다'의 제작사인 눈엔터테인먼트가 영화화 추진 의사를 오래전에 밝혔다.'궁'을 만드는 에이트픽스는 백댄서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김수용씨의 베스트셀러 만화'힙합'의 판권도 사놓은 상태다.

만화계에서는 이 같은 흐름이 침체된 만화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새로운 시장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궁'의 판권 계약을 성사시킨 서울문화사의 김영중 국장은 "순정만화는 성격상 소년만화와 달리 게임 같은 2차 상품보다는 드라마.영화 쪽이 더 맞다"면서 "이런 작품들을 적극 발굴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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