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시대명음반>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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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윽고 겨울이 찾아오면 철새 도래지처럼 늘 우리 가슴속에 아늑한 자리를 마련하는 음악이 있다.바로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다.
불운한 삶을 영위했던 슈베르트로서는 이 연가곡을 통해 자화상을 그리려고 했던 것일까.뮐러의 시에 붙인 24편의 가곡은 낱낱이 어둡고 쓸쓸하며 적막한 일상을 보여준다.사랑을 잃고 더욱가련해진 한 사내가 찬바람을 맞으며 작별인사를 하는 것으로 겨울여행은 시작된다.
『나그네처럼 이곳에 왔듯이/이제 나그네처럼 떠나가네/여름날은내게 좋았어라/도처에 피어있던 꽃들/사랑한다 말했던 소녀…/ 이제 세상은 절망뿐/절망으로 향하는 길이 눈으로 덮여있네…』 비평가 필립 레드클리프의 말을 빌리면 슈베르트는 「화성의 이동을 통한 효과」를 탁월하게 살려낸 인물이었다.노래와 가사.반주가 절묘한 조화를 이뤄냈고 화성의 흐름에 따라 신비한 효과를 창출했다는 이야기다.가사를 생각해 볼때 바리톤이 극적인 효과를잘 살려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헤르만 프라이,한스 호터 등 전설적인 리트 가수들이 『겨울나그네』와 함께 우리 귀에 생생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낮은 목소리의 여성가수는 어떨까.메조소프라노나 알토의 『겨울나그네』는 무모한 시도일까.88년 브리기트 파스벤더가 스튜디오에 서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그러나 뜻밖에 남성가수와는 전혀 다른 풍부한 표현능력이 또 하나의 경이로운 『겨울나그네』를 탄생시켰다.여성가수 그리스타 루드비히,시라이 미쓰코가 이 작품에 도전한 적이 있지만 음반사에 남을 영광은 아무래도 파스벤더에게 양보해야 할 터이다.곡의 흐름에 따라 매무새를 풀었다 조였다 하는 반주자 아리 베르트 라이만의 솜씨도 제럴드 무어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특히 귀에 익은 『보리수』나 『거리의 악사』에서 들려주는 파스벤더의 표현능력은 엄청나다.듣기 좋은 성량만으로 슈베르트의 정서를 대신하려했던 적잖은 바리톤들에 비한다면… 아마 그녀 자신도 비교를 거부할 것이다.사족으로 그녀의 아버지 돔그라프 파스벤더 또한 베를린 국립오페라에서 활약한 당대의 명가수였다.부전여전이라고나 할까.여성가수의 음반중에서가 아니라 모든 『겨울나그네』를 통틀어 가장 빼어난 음반의 하나.필자의 믿음이다.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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