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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원류를찾아서>3.황금의 박물관 리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며칠동안이나 잉카 유적지를 답사하고 나서도 도무지 잉카문명의실체를 그려볼 수 없었다.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쌓았다는 쿠스코의 돌축대도,마추피추의 돌집들도,쿠스코의 소규모 박물관들에 전시되어 있는 석기와 토기들도 잉카인들이 고도의 석기문화를 이루고 살았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의미를 전해주지 않았다.
철기문명도 모르고 문자라는 개념조차 없던 잉카인들이란 그들이쌓은 돌축대가 아무리 정교하고 웅장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결국엔뒤늦게까지 석기시대를 살다간 미개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지 마시고 리마에서 좀 쉬었다 가세요.「황금의 박물관」이 있는데요.』 리마 공항의 한 직원은 잉카문명의 실체를 찾겠다고 쿠스코에 갔다가 실망한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마야문명의유적을 보러 과테말라에 서둘러 가겠다는 나에게 말했다.그간 3천5백m의 고원지대에서 산소 부족에 몹시 지친 나는 그의 조언을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황금의 박물관」은 리마 교외의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신대륙의 금이 한창 유럽으로 건너갈 무럽 페루의 한 실업가가주섬주섬 사 모은 잉카의 황금 예술품들을 후에 그가 살던 집에전시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1층에 전시된 총포들을 대충 훑어보고 나서 허름한 카펫이 깔린 계단을 따라 지하 로 가니 희미한전등불 아래 금.은.보화들이 번쩍이고 있었다.
청옥을 황금에 박아 만든 예식용 칼과 미라에 씌웠던 황금 가면을 비롯하여 가지가지 고예술품들이 빽빽히 진열돼 있었다.여인의 드레스도 커튼도 카펫도 온통 황금으로 번쩍였다.
황금으로 된 진열품들이 워낙 많아 그랬는지 열아홉개나 되는 금관도 아무렇게나 벽에 걸려 있었다.전시된 것은 황금 뿐만이 아니었다.가지각색의 진귀한 보석들과 신비로운 문양을 넣어 곱게짠 직물들은 지금이라도 패션을 좋아하는 여인들이 탐낼 멋진 것들이었다.
당시 세계최고의 부를 누리던 잉카인들은 오늘날 선진국에서 그렇듯이 상당히 색정적이었던 듯 상당수의 토기와 조각품들이 성(性)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뉴욕 42번가의 섹스 숍에 내놓아도조금도 손색없는 그런 물건들도 있었다.풍요를 구 가했던 잉카인들은 사후에도 다시 잉카 땅에 태어나기를 염원했던 듯 여러 구의 미라들도 고운 의상에 찬란한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잉카의 황금을 모두 가져갔습니다.침략군을 지휘했던 피자로는 병사들이 긁어모은 황금 예술품들을 모두 녹였답니다.2만7천t의 금괴 가운데 5분의 1을 스페인왕의 몫으로 할당해놓은 다음 상당량은 자신과 형제들이 나누어 갖고 나머지는 정복에 참가했던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가장 적게 받은 병사가 70t의 금을 받았답니다.』인디오 안내인은 더이상말을 잇지 못했다.
아닌게 아니라 해밀톤이 쓴「유럽경제사」에 의하면 스페인이 잉카를 정복하던 30년전쟁동안 신대륙에서 흘러들어간 황금은 자그마치 80여만t이나 되며,신대륙 경영 1백50년동안 스페인이 가져간 황금의 양은 유럽 역사 2000년동안 유럽제 국이 모았던 황금의 3배에 달하여 유럽은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한다.
진열품들을 대충대충 보는데만도 대여섯 시간이 걸릴 정도로 소장품은 실로 엄청난 양이었지만 거의가 밀납주조 방식으로 속이 텅비게 만들었거나 합금.도금한 것이 많았으므로 박물관에 있는 모든 금세공품들을 피자로가 했던 것처럼 금괴로 만 든다 해도 그 무게는 2~3t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았다.
피자로가 녹여갔다는 2만7천t의 황금 예술품에 비하면 이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것들은 고작 1만분의1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내가 입을 벌리며 감탄해 마지않던 이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아마도 그들이 시시하다고 내버렸던 것들일지도 모른다 .
『2만7천t의 황금 예술품들을 녹여간 피자로는 잉카 정복5년후 리마에서 암살되었습니다.그의 동생 환 피자로는 1536년 쿠스코 대회전에서 인디오가 날려보낸 돌에 맞아 죽었고,나머지 두 동생들도 후에 대역죄로 처형되었답니다.』안내인은 씁쓸 히 웃어 보이며 박물관이 문을 닫을 시간이라고 했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어둠이 깔려 있었다.으시시한 바람이 부는 황량한 거리를 낡아빠진 60년대의 외제 자동차들이 검은 연기를 뿜어대며 달리고 있었다.남루한 옷을 입은 인디오 소녀들이집에서 짠 민속의상을 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왜 오늘날 페루 땅은 이토록 가난해야 하는가.어째서 잉카의 후예들은 옛처럼 황금을 캐내지 못하는가.
그날밤 늦도록 나는 황금의 잉카를 재현해 보려고 애썼다.쿠스코의 돌담 사이로 환생한 미라들이 금.은.보화로 장식한 잉카의의상을 입고 걷는 것 밖에,잉카제국 최후의 날 삭사이와만 전투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돌을 끈에 달아 휘두르는 것밖에,그 이상 아무 것도 그려볼 수 없었다.인류 역사상 황금이 너무 많아 화폐 구실을 못한 나라는 잉카뿐이다.
〈서울大법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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