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재 기자의 웰컴 투 풋 볼 <29>기술위원장은 뭐하는 자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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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올 봄 ‘웰컴투풋볼’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짐한 게 있다. ‘밝고 훈훈하고 재미있는 축구 얘기를 들려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K-리그 선수들은 서로 침을 뱉었고, 국가대표들은 숙소를 이탈해 술을 마셨다. 일부 심판은 자질과 의도가 의심스러웠으며, 내셔널리그는 승격 문제로 갈팡질팡했다. 칼럼은 점점 딱딱해져 갔다.

급기야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얘기, “누구누구는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말을 해야 할 상황이 됐다. 대한축구협회 이영무 기술위원장과 기술위원들 말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독하게 마음먹고 할 말은 해야겠다.

핌 베어벡 사퇴 이후 새 대표팀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기술위는 숱한 실책을 저질렀다. 그들은 막연한 정보를 갖고 4개월을 허송하다 그릇된 판단을 했다. 우선협상 대상자로 제라르 울리에(60·프랑스)와 마이클 매카시(48·아일랜드)를 정했다. 하지만 그들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한국에 오는 데 걸림돌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지 않았다. 가삼현 사무총장의 말대로라면 기술위는 ‘명함 두 장만 달랑 주고’ 뽑아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기술위의 더 큰 잘못은 국내 지도자들을 ‘땜질용’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명장 영입이 실패로 돌아가자 기술위는 부랴부랴 심야회의를 열어 허정무 감독을 선임했다.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이 위원장은 허 감독을 옆에 두고 “외국인 감독 영입이 실패하는 바람에 국내 감독으로 바꿨다. 아직은 외국 지도자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했다.

역대 기술위원장은 대부분 대표팀 사령탑과 진퇴를 함께했다. 2005년 12월 출범한 ‘이영무 사단’만 예외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했어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노메달로 귀국했어도, 올해 20세 이하, 17세 이하 세계선수권대회 예선에서 탈락했어도 ‘남의 일’이었다. 8월 베어벡이 사퇴한 뒤 진퇴를 묻자 그는 “올림픽팀 감독을 선임한 뒤에”라며 슬쩍 발을 빼더니 요즘은 “허 감독과 2010년 월드컵까지 함께 가겠다”고 한다.

이 위원장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왜소한 체격의 단점을 극복한 ‘원조 산소탱크’였다. 은퇴 후에는 신학을 했고, 온화한 인품으로 축구 선교에 앞장섰다. 그러나 축구팬이 기술위원회에 원하는 것은 ‘성직자적 성품’이 아니라 ‘날카로운 분석과 방향 제시’다. 그 역할을 못한다면 스스로 물러나는 게 마땅하다.

 
정영재 축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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