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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에 윤전기 기증때 현수막 뺏기고 국호 삭제 수모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해 11월 평양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 한국위원회 주최 윤전기 기증식에서 기념촬영 현수막 문구를 문제삼은 북한측이 현수막을 빼앗고 현수막에 적힌 ‘대한’이라는 글자를 삭제하고 돌려준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유네스코 한국위는 위원장인 김신일 교육부총리는 물론 통일부에도 이같은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위원회가 이같은 처사에도 공식 사과 요구나 유감 표명을 하지 않은 것은 ‘저자세’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한 교육성이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에 교과서 제작을 위한 윤전기 기증을 요청한 것은 2000년. 유네스코 본부는 한국 정부에 이같은 사실을 알렸다. 지난해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주선으로 ㈜대한교과서 소유의 8색 윤전 인쇄기를 북측에 기증했다. 1982년 프랑스제 ‘하리스 M200A’ 모델로 시가 5억원짜리다.

북측에 의해 압수당한 후 남측의 끈질긴 설득 끝에 기념촬영 때 받은 현수막. 대한교과서주식회사의 "대한"이 강제로 삭제됐다. 평양도서인쇄공장의 "평양"이라는 글자가 어색한 것은 ‘대한’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수정했기 때문이다. 당초 문구는 "조선도서인쇄공장"이었다.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이삼열 사무총장이다.

유네스코 한국위가 현수막에 적어간 문구는 ‘경축 8색 인쇄 윤전기 기증식,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유네스코위원회 조선교육도서인쇄공장 2006년 11월 30일’.

현수막은 평양 인쇄공장에 윤전기 작동법 교육을 위해 파견 가있던 대한교과서 실무 담당자가 평양으로 오는 인편으로 전달받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기증식 준비 과정에서 이 현수막을 본 북한 측이 ‘대한’이라는 문구를 문제 삼아 현수막을 압수했다. 대한교과서 관계자는 “기증식이 끝난 다음 그래도 기념 사진 하나쯤은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대한’이라는 글자를 지운 현수막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교육도서인쇄공장’도 ‘평양교육도서인쇄공장’으로 정정됐다.

당시 목격자는 “대표단이 올 때까지도 북한 관계자가 현수막을 내놓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현수막 없이 시운전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증식 때도 북한 인쇄공장 직원들과 다 같이 행사를 치르고 싶었지만 북측은 공장 직원들을 모두 공장 건물 밖으로 내보내 남측 인사들만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기증식이 열렸다”고 증언했다.

기증식 사진은 유네스코 한국위가 발행하는 월간 소식지 ‘유네스코 뉴스’ 2007년 1월호에 실렸다. 하지만 문구 삭제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에 비해 대한교과서 사보는 2007년 1ㆍ2월호에 같은 사진을 게재하면서 “북측에서 현수막에서 ‘대한’이라는 문구를 지웠다”고 소개했다.

대한교과서의 한 관계자는 “북한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회사 이름에 왜 ‘대한’이 빠졌는지 궁금했었다”면서 “당시 언론에 배포한 사진에는 ‘대한’이라는 문구를 컴퓨터로 그려 넣었다”고 털어놓았다.

유네스코 한국위 강상규 국제협력 담당은 “남북한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며 “북한에 윤전기 설치가 완료된 뒤에 벌어진 일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1995년 6월에도 쌀 2000톤을 싣고 북한에 간 ‘시 아펙스’ 호가 청진항 부두에서 하역작업중 북측의 강요로 태극기를 떼고 인공기를 게양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강경여론에 직면한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공식사과를 요구하고 대북 지원을 전면 중단하는 등 초강경 대응을 했었다. 통일부 관계자는 “(그 사건 이후) 정부가 쌀이나 비료를 지원할 때 대한적십자사와 같이 그대로 표기한다”며 “그것을 북한에서 문제 삼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김용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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