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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제 수능이 학력 왜곡시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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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앙일보·중앙SUNDAY가 7일부터 사흘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장에서 개최한 '2008대입 정시지원 전략 설명회'에 무려 1만여 명의 학생·학부모들이 다녀갔다. 행사에 참가한 입시학원들이 배포한 수능 등급별 지원 가능 대학 배치표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사진=최정동.안성식 기자]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네이버에 8일 '등급제 무효 행정소송 준비위'라는 카페가 등장했다. 카페에는 생긴 지 하루 만에 수백 개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대입을 로또 복권처림 치를 수는 없다' '교육부는 응시생의 백분위와 표준점수를 공개하라'는 등 모두 평준화 등급제 수능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아이디 '윤아라인'을 쓰는 수험생은 '언어(89점, 2등급), 외국어(95점, 2등급), 한국지리(37점, 3등급)에서 모두 1점 차이로 등급이 하나씩 내려갔는데 원점수에서 20점이나 낮은 학생과 등급이 같다'며 '등급제의 목적이 대입의 운세화냐'는 항의 글을 올렸다.

7일 수능 성적표 발표 이후 1~2점 차이로 등급이 떨어진 수험생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특히 학생부(내신) 성적이 좋은 자연계열 수험생 중 수리 가형에서 3점 또는 4점짜리 한 문제를 틀려 2등급을 받은 수험생 가운데는 아예 재수를 결심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평준화 등급제 수능의 폐해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내신 좋아도 수능 때문에"=서울 영등포구 Y고교 한모 교사는 7일 수능 성적표를 나눠주며 "실력이 아니라 운에 따라 갈 수 있는 대학이 결정된다고 보는 학생들을 보며 안쓰러웠다"고 말했다. 1점 차로 등급이 떨어진 학생은 '운이 나빴다'고 억울해 하고, 반대로 아슬아슬하게 등급이 오른 학생은 '대박 쳤다'고 좋아한 것이다. 한 교사는 "1, 2점 더 받기 위해 밤새워 공부해 온 학생들에게 등급제는 너무 가혹하다"고 말했다.

등급제 수능은 학생의 실력 차이를 무디게 했다. 내신 1.6등급의 최상위권인 부산 K고의 A학생이 수능 언어.수리(나).외국어 영역에서 받은 총점은 283점(가채점 추정치), 평균 1.3등급이다. 같은 학교 B학생은 내신에서 2.5등급으로 A와 1등급가량 떨어진다. 그는 수능 총점을 A보다 11점 덜 받았지만 평균 등급은 같다. 학생부와 수능 모두 A가 더 우수하지만 등급제 수능에서는 이런 실력 차가 반영되지 않는 것이다.

담임인 김모 교사는 "지난해까지는 수능에서 1~2점 낮아도 면접이나 논술에서 만회할 수 있었지만 올해는 수능 등급이 한 단계 떨어지면 진학 가능한 대학이 달라지니 학생들이 승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학교에서 한의예과를 지망했던 한 학생은 외국어 영역에서 1점 차로 2등급을 받아 꿈을 포기했다. 내신성적을 최상위권으로 관리하고 다른 수능 영역도 1등급을 받았지만 소용없게 됐다. 대학별 환산 수능점수를 적용하면 1개 등급마다 5~10점 이상 벌어지기 때문이다.

◆'수리 가' 동점이라도 등급은 달라=수리 가형은 원점수 기준으로 선택과목 점수가 같더라도 다른 등급을 받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른 수험생의 성적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 상대평가 등급제의 한계 때문이다.

자연계 학생이 응시하는 수리 가형은 ▶공통과목(1~25번) ▶선택과목(26~30번)의 30개 문항으로 구성돼 있다. 수리 가를 선택한 11만7273명의 수험생 중 선택과목은 ▶미분과 적분(11만3018명.96.4%) ▶확률과 통계(3379명.2.9%) ▶이산수학(876명.0.7%)으로 나뉘었다.

이남렬 서울시교육청 연구사는 "수리 가형은 원점수가 아닌 표준점수로 변환한 뒤 등급을 판정한다"며 "난이도 높은 과목을 선택한 학생의 불이익을 막기 위한 조치지만, 동점자라도 등급이 다를 수 있어 학생들이 혼란스러워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공통과목에서 4점짜리 문항 두 개를 틀린 학생과 공통과목과 선택과목에서 4점씩을 깎인 학생의 원점수는 100점 만점 중 92점으로 같다. 그러나 등급은 3등급과 2등급으로 차이가 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수리 가형과 과학탐구 4개 과목을 치른 수험생 중 190명(0.11%)만이 전 과목에서 1등급을 받아 변별력이 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수리 가형에서만 2등급을 받고 나머지 전 과목 1등급을 받은 학생도 128명에 이른다. 이 중 상당수는 수리 가형에서 1점 차, 혹은 선택과목에 따라 동점을 받고도 2등급으로 밀려났을 수 있다. 그러나 대학별 환산점수 가중치에 따라 이들의 점수는 ▶서울대 5점 차 ▶고려대 8점 차 등으로 격차가 확 벌어진다.

글=배노필.박수련 기자 , 사진=최정동.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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