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볼모로 실험 그만 … 새 정권 대입 개혁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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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정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은 9일 본지 기자와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수능은 흠 잡을 데 없는 출제였다"고 자평했다. 교육과정평가원은 수능출제와 채점을 책임지는 기관이다. 7일 수능성적 발표 이후 '평준화 등급제 수능'으로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나온 말이다. 그는 한 문제만 틀려도 1등급에서 2등급으로 추락하는 등급제의 불합리 지적에 대해서는 "한 문제가 실수로 틀렸는지 실력으로 틀렸는지 구분하는 평가는 하늘 아래 없다"고 말했다. 수리 가형에 대해서는 "1등급 비율이 기준 비율(4%)대로 잘 나왔다"고 주장했다.

평준화 수능 등급제는 2003년 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처음 제안됐다. 2003년 말 이를 구체화한 것은 진보 성향을 자처하는 교육 전문가들로 구성된 교육혁신위원회(위원장 전성은)다. 당시 수능 등급은 5~7등급, 1등급 비율은 4%가 아니라 7%가 될 뻔했다. 점수를 발표하지 않고 1등급을 많이 줘 ▶수능의 영향력을 줄여 사교육 부담을 줄이고 ▶공교육을 정상화하며 ▶특목고를 무력화하려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7등급으로 나누거나 9등급으로 하더라도 등급별 비율을 같게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교육 전문가들은 "정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 학생을 실험용으로 이용하는 일은 다시 없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진곤 한양대 교수는 "노 대통령의 생각대로 수능이 5~7등급으로 바뀌거나 1등급 비율이 7%로 정해졌으면 지금 어떤 혼란을 겪을지 상상이 안 간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현 정권이 대학 평준화와 수능을 무력화하려는 평등주의 이데올로기로 등급제 혼란을 초래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권대봉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현 정부 집권 세력이 대학 평준화와 교육비 경감 차원에서 (등급제를) 도입했으나 사교육은 줄지도 않고 혼란만 생겼다"며 "정부가 개입하면 혼란만 가중된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이 제도를 앞으로 3년간 더 끌고 가서는 안 된다"며 "지금이라도 당장 폐지하거나, 존치할 경우엔 대학별 자율을 인정하는 등 보완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대통령 후보들은 수능 등급제의 존폐나 보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후보는 대학 자율을, 정동영 후보는 수능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어지는 혼란 양상=이날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 3관에서 열린 중앙일보.중앙SUNDAY 주최 대입 설명회에서는 대학 지원 정보를 얻기 위한 수험생.학부모 4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학원들이 제공하는 '정시모집 지원 대학 배치표'는 순식간에 동이 날 정도였다. 이날 강연한 유병화 비타에듀 평가이사는 "막막하다는 학부모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재수생 김모(19)군은 "지난해 고3 때 본 수능보다 원점수 총점으로는 50점 정도 올랐다"며 "표준점수가 있었던 지난해 같았으면 서울대에 원서 쓸 점수였는데 등급제 때문에 올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일부 네티즌들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등급제 무효 행정소송 준비위' 카페를 만들고, 수능 등급제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한편, 행정소송을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강홍준.배노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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