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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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그리고,산 자도 말이 없었다(4) 『다를거 없다.나도 뭐 패랭이에 숟가락 꽂아놓고 살던 사람이니까.』푸푸 거리면서 화순이 실없이 웃었다.
『왜요? 여기 와있는 조선사람들,다 집에 금송아지 매여 있고,고대광실에 비단이불인데요.아저씨는 안그래요?』 『실없는 소리들이지.세상에 그런 놈들이 뭐가 아쉬워서 징용을 나오고,목구멍에 풀칠 하나 하자고 여기까지 온다더냐.머슴질도 못 되는 여길.』 병원으로 오르는 계단을 그들은 뒤뚱거리며 걸어올라갔다.잘린 다리쪽은 목발을 짚고 다른 쪽은 화순이 겨드랑을 끼고 그들은 병원 앞에 가 섰다.병원 창문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명국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광대뼈가 튀어나오게 마른 얼굴이 불빛에 그림자가 지면서 더욱 야위어 보였다.
흐느끼며 울부짖고 나니 차라리 마음은 편했는데,그러나 가슴 밑바닥에 성에가 끼듯 싸아하니 마음이 추워와서 화순은 어깨를 움츠렸다.불빛 가득한 병원 창문을 바라보면서 명국이 혼잣말처럼중얼거렸다.
『여기 있는 거야 차라리 낫지.다들 나나 뭐 다를 거 없는 신세들,다리 없고 팔 없는 것들만 제 세상 만난 듯이 우글우글하니까.』 명국의 말을 들으며 화순은 등이 오싹해진다.
『무서워요.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세상 나갈 일이 까마득하다는 말이야.거기 나가야 이제 알 거 아니냐.팔 없고 다리없는 게 뭐라는 걸.남들은 다들 사지 멀쩡한데 저 혼자 찔룩거리며 다녀봐야 알 거 아니겠어.풍년거지가 더 서럽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거구나 싶다 .남들은 다 먹을 거 쟁여놓은 풍년에거지가 더 서러운 거란다.』 병원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며 불빛 속으로 흔들리던 그림자가 다가왔다.병원의 이시다였다.머리를뒤로 묶어 무늬 있는 천으로 잡아맨 모습으로 바쁘게 걸어오던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누구예요?』 『나,납니다.』 명국이 화순이 부축한 쪽 손으로 목발을 들어올려 보이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이러면 안 돼요!』 이시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쇠를 긁듯이 차가웠다.
『저… 산보 좀 했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산보하래요? 그따위 안 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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