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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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윤찬이라는 사학과 친구가 멋쩍어하면서 물러가고,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다는 우리과 친구가 다시 발표를 계속하기 시작했을 때,나는 슬그머니 세미나실을 빠져나왔다.서울의 밤하늘에서는 볼수 없는 별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처럼 요■ 했다.그리고 바람은,차지만 신선했다.
몇발짝을 옮기니까 발 아래로 호수였다.어두웠지만,호수의 잔물결에 달빛이 반사돼서 반짝이고 있었다.나는 담배를 빼어 물고 불을 붙였다.연기를 내뿜어대면서,밤호수가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수련회에는 괜히 따라왔다고 후회하였다.진작 이런 건줄 알았다면오랜만에 그 징그러운 악동들 얼굴이라도 보는 게 훨씬 나았을 거였다. 『저두…담배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돌아보니 채소라였다.소라가 내게 어깨를 한번 들썩여보였다.
내가 담배 한 개비를 내밀고 나서 라이터를 켜주었다.바람 때문에 자꾸만 불이 꺼졌다.그래서 나는 두손을 동그랗게 오무려 바람을 막으면서 불을 소라의 코밑에 대주었다.소라가 입술을 뾰쪽하게 내밀며 불을 빠는 동안 예쁜 얼굴이 가까이 에 보이다가사라졌다.소라와 나는 근처에 서있던 자동차에 기대서 밤호수를 내려다보면서 담배를 태웠다.
『뭐 그렇게 화낼 건 없는 일이잖아요.』 『전요,우리과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게 이상해요.제가 물건인가요.주인인 것처럼 빌려준다고 그러구요.』 『그건 소라씨한테도 좀 책임이 있을 거라구요.그동안 우리하고 잘 어울리지 않았잖아.그러니까 우리과 사람들도 소라씨가 좀 어려웠을 거란 말이에요.더군다나 소라씨는 유명한 사람이구…그러던 참에 다른과에서라도 소라씨를 정면으로 끌어내겠 다고 하니까 어디 그냥 놔두고 보자 그러고 있었던 건지 모르지…요.』 나는 반말을 하기도 그렇고 존대말을 쓰기도 그래서 말하기가 아주 어색했다.소라가 잠깐 사이를 뒀다가 말했다.
『유명하긴요 뭐.아역 배우는 엄마가 시켜서 아무 것도 모르고한 거구요.그러다 보니까 탤런트가 됐지만요,고등학교에서는 원래무용을 했거든요.』 『근데 국문과엔 왜….』 『그래요.무릎을 다치지만 않았으면 무용과에 갔을텐데…그 다음에 갈 데가 국문과밖에 없더라구요.나두 사람들 하고 좀 잘 어울렸으면 좋겠는데…어쩐지 자꾸만 겉돌게 되거든요.이상해요.』 우리가 기대 선 앞으로 시커먼 사람 하나가 지나가다가 어!하면서 멈춰섰다.윤찬이라는 친구였다.
『이거 아까는 미안했어요.소라씨를 화나게 만들 생각은 없었거든요.벌써 이렇게 임자가 있는 줄도 몰랐구요.』 내가 윤찬이라는 친구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 국문과의 김달숩니다.임자는 아니니까 실망할 건 없구요.
』 윤찬과 내가 악수하는 걸 소라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혼자 방황하러 나온 거라면…여기서 같이 이야기나 합시다.소라씨도 친구 사귀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거든요.』 소라가 또 한번 어깨를 들썩였다.크게 반대할 의사는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소라도 나처럼 윤찬이라는 친구에게 호감을 느낀 건지도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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