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갈길 먼 세계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인도네시아에 나가있는 우리나라 봉제 의류 공장들은 대부분 50명정도씩 현지인을 「아주 특별한 일」에 투입한다.한국에서 들여온 옷감(봉제 원단)두루마리에 번호를 매기는 단순 노동이다.
아무리 한달 80달러정도의 싼 임금을 주고 시키는 일이라곤 하지만 한두명도 아닌 수십명을 고용해 이런 일을 시키는 이유를들어보면 기가 막힌다.
분명히 같은 색상과 질의 옷감을 보내달라고 했고 한 컨테이너에 실어 들여왔는데 색상이 조금씩 달라 문제가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같은 색상인줄 알고 재킷 앞.뒷면을 서로 다른 두루마리의 원단을 써 만들어 수출했다가 색깔이 다르다하여 클레임을 당한 경우가 벌써 여러차례였다.
바느질이나 가공솜씨의 문제가 아닌 원단 자체의 결함으로 일어나는 클레임이 많아지자 현지 진출 봉제업체들은 이같이 번호를 매기고 번호가 다른 두루마리의 원단으로는 절대로 한벌의 옷을 만들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나라 원.부자재 수출상품의 현주소다.
인도네시아의 봉제 의류 업체들처럼 해외진출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원.부자재를 한국에서 들여오고 있다.우리 입장에서 보면 아주 「안정적인 수출」이다.그런데 이런 해외진출 기업에 나가는원.부자재가 따로 품질을 가리는 직원을 둬야 할 만큼 한심해서야 말이 안된다.
이와는 또 다른 「현지(現地)경험담」도 있다.
인도네시아에 우리 신발기업들이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88년 무렵부터였다.그러자 인도네시아 정부도 아닌 우리 정부는 89년3월부터 과당경쟁을 막는다며 국내에서 해괴한 규제를 하기 시작했다. 「한 공장의 생산라인은 3개까지,한 지역의 업체는 5개까지,업체당 투자금액은 2백만달러까지」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4년뒤인 지난해 5월 규제완화 바람속에 이같은 투자제한은 겨우 풀렸지만 그 4년간 적정생산규모를 맞추지 못한 일부 우리 업체들은 남에게 넘어가거나 문을 닫는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정부규제는 국내 업계의 경쟁력도 지키지 못한 채 해외진출도 더 키우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 업계의 지적이다.
세계화시대에 정부는 왜 규제를 풀어야 하며,기업은 왜 품질향상에 더 노력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는 「현지 경험담」들이다.
[자카르타=梁在燦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