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31. 서울음대의 첫 제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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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서울신문 주최 제1회 한국문화대상을 수상한 이재숙과 함께한필자(左).

서울대학교 국악과가 출범한 첫 해인 1959년 3월이었다. 서양음악을 전공하려다가 마지못해 국악과로 오게 된 신입생들과의 첫 만남의 자리가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국악기 중에서 가야금을 선택한 10여 명의 제자들이 모였다. 갓 대학을 졸업한 나로서는 선생으로의 기대를 품었던 자리였다.

이 학생들에게 가야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해주고 돌아서는 순간, 한 학생이 나를 따라 나왔다. “선생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인지 봤더니 성실하면서도 재기 넘치게 생긴 여학생이 서 있었다.

“저는 다른 학생들과 다릅니다. 가야금을 제대로 한번 배워 여기에 저의 모든 것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당찬 말투였다. 이 여학생은 과연 모든 학생 중에 가장 열심히 가야금을 배웠다. 학교 수업으로 받는 레슨은 물론이고 방학 동안에는 우리 집으로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원래 성악을 전공하고자 했던 그의 가야금 실력은 놀랄만큼 빨리 늘었다. 다른 학생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배우는 국악을 그는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 학생이 국악과 1회 졸업생인 이재숙(66)이다. 타고난 성실함으로 음악을 배운 그는 내가 참 운이 좋은 선생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 학생이다. 나에게 4년 동안 배운 후에 서울대 대학원까지 나왔고 모교의 교수가 됐다. 첫 해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이재숙은 참 성실히 가야금을 배웠다. 나는 그에게 외국인 중에 가야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하고 연주 기회가 있으면 부지런히 그를 무대에 세웠다.

또 나의 스승인 김윤덕 선생에게 직접 배우라고 보내기도 했는데, 그 후 다른 산조 대가들에게도 찾아다니며 가야금산조 다섯 유파를 채보하여 악보집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가 가야금을 대학에서 전공한 제1세대로 1964년에 첫 독주회를 열 때는 아주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두번째 제자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정자(65)다. 2회로 들어온 김정자는 80년대에 내가 작곡한 곡만으로 독주회를 연 첫번째 음악인이었다. 당시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내 가야금 작품들을 연주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섬세하고도 깊이 있는 연주를 했다. 그는 이처럼 창작곡은 물론 산조까지 모두 배웠는데, 차츰 정악에 몰두해 지금은 가야금 정악의 전문가로 자리잡았다.

초창기 국악과 학생들은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국악에 적응하지 못해 음악 자체를 그만둔 사람, 서양음악으로 다시 돌아가 서양음악가가 된 사람, 그리고 마지막 부류가 이재숙·김정자처럼 국악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이들이다. 어려운 순간에 올바른 결심을 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다. 대학에 갓 들어왔던 첫 학생들이 이제 65세를 훌쩍 넘겨 은퇴를 한 것을 보며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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