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 9.조훈현.서봉수 숙적관계 15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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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80년의 마지막을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가 종로일대를 울리고 있었다.김인(金寅)9단을 따라 관철동 뒷골목의 소줏집에 앉아있던 조훈현(曺薰鉉)이 갑자기 절반쯤 채워진 소주잔을 단숨에 비웠다.얼굴에서 목,손바닥까지 그의 드러난 신체는 불타는 선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金9단이 반잔쯤 따라놓자 그는 그것마저 단숨에 마시더니 집에 간다며 사라졌다.
헤어진지 10여분후 우리가 한 여관앞에 서 있을때 깜깜한 골목 저쪽 끝에서 담벽을 더듬으며 누군가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다.그는 가까스로 여관문을 밀고 들어서더니 그대로 쓰러졌다.조훈현이었다.
曺9단은 술이 전혀 받지않아 활명수에도 취한다.그는 나중에 말했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죽는구나 싶었다.』 조치훈(趙治勳)이 조훈현을 술마시게 했다.이후로 曺9단은 다시 술마시지않았으나 이때 맛본 세상인심과 술맛은 그의 인생에서 새로운 결심의 계기가 되었다.『국내최강은 아무 것도 아니다.세계를 잡아야 한다.』 만리장성을 넘어온 서봉수(徐奉洙)가 曺9단이 흔들리던 이때 진격을 개시했다.왕위(王位)를 탈취하여 曺9단의 천하통일을 허문 徐9단은 81년이 되자마자 최고위(最高位)와 국기(國棋)를 잇따라 빼앗아 타이틀을 3대4로 양분했다.
조치훈의 위용을 본뒤 徐9단은 『일본에 가고싶다』고 말하곤 했다.『유학생으로 가고싶지는 않다.가서 싸우고 싸워 타이틀을 차지하겠다.』 그의 야심은 타이틀수가 늘어나면서 저절로 좌절(?)됐다.타이틀보유자가 외국에 나가면 도전자가 시합때마다 외국에 가야한다.그렇다고 타이틀을 버리고 가자니 용납이 안된다.80년대초,한일(韓日)바둑계를 거머쥐고 있던 3웅의 관계는 이렇게 미묘했다.상류사회라 말할 수 있는 조치훈의 영토로 가서 칼을 맞대고 겨뤄보고 싶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조훈현과 서봉수는그리하여 둘이서 싸웠다.
유명한 「曺-徐15년대전」은 이렇게해서 점점 치열해졌다.그들은 현재까지 무려 3백16번을 싸웠는데 이것은 두사람만의 대결로는 세계기록이다.그중 曺9단은 2백20번을 이겼고 徐9단은 96번 이겼다.
사이는 별로 좋지않아 복기도 하지 않았다.내성적인 曺9단은 거친 徐9단이 싫었고,徐9단쪽은 조훈현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꺾어야할 타도의 대상일 뿐이었다.두사람만의 잔치가 이어지자 동료들도 점차 고개를 돌렸다.도전기가 열리면 항상 시끌벅적하던 운당여관은 이윽고 프로기사의 발길이 뚝 끊겼다.그러거나 말거나두사람은 전력을 다해 싸웠다.옛날의 아취있던 승부가 아니었다.
어느날 曺9단은 대승을 거둔 상태에서 55분을 장고했다.승패를떠나 그 장면의 최선,그러니까 뼈를 부러뜨리는 수를 찾고 있었다.徐9단은 부족한 기술을 승부기질과 온갖 전술로 보완하며 지고 또 지면서도 끝내 패퇴하지는 않았다.82년 曺9단은 제2차천하통일에 성공했고 徐9단은 다시 북방으로 쫓겨났다.그러나 83년엔 다시 명인 (名人)과 기왕(棋王)을 쟁취하며 대들었다.
문자 그대로 숙적이었다.이 치열한 전쟁속에서 실력은 부쩍 늘었다.훗날 徐9단은 『조훈현이 내 스승이었다』고 했고 曺9단도 『서봉수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승부세계만 이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화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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