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신바람 살리는 지도자 나와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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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승신씨와 대화를 나누는 강원용 목사<右>.

“이번 대선에선 ‘정략가’가 아니라 ‘진짜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지난해 8월17일,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강원용 목사의 말이다. 그는 숨을 거두기 불과 11일 전에 전 방송위원회 국제협력위원 이승신(손호연 단가연구소 대표)씨와 서울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가졌다. 그리고 닷새 후에 의식을 잃었고, 또 엿새 후에는 고인이 됐다.

약 3시간에 걸친 ‘생애 최후의 인터뷰’에는 강 목사의 기도와 예수, 그가 아끼는 역사 속 인물과 우주관,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사람들, 영화, 드라마, 청소년 문제, 여성의 인간화, 환경, 생명, 평화 그리고 2007년 대통령 선거를 겨냥한 가슴 절절한 ‘충고’가 담겨 있다. 또한 그 ‘충고’는 과거형에 머물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생동감 넘치는 현재형의 메시지로 꿈틀거린다. 두 차례로 예정됐던 대담은 불과 며칠 뒤, 강목사가 의식을 다하여 1차에 그쳤다. 강원용 방송위원회 위원장 당시 미국의 방송인으로 위원회에 초빙되어 온 이승신씨에 의해 기획 구성 진행 제작돼 1년이 너머 이제야 완성이 됐다.

중앙일보는 2007년 대선, 그리고 성탄절을 앞둔 시점에서 동영상 인터뷰를 입수, 고인이 된 강 목사를 다시 만났다. ‘마지막 인터뷰’ 속의 강 목사는 지금도 숨을 쉬고 있었다.

#2007년 대선과 진짜 지도자

“2007년 대선에서 어떤 지도자를 뽑아야 하나?”란 이승신 대표의 질문에 강 목사는 ‘민족의 신바람’을 꼽았다. “우리나라 국민에겐 ‘신바람’이란 게 있다. 신바람만 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도저히 못할 일을 우리는 한다. 올림픽과 월드컵이 좋은 예다. 우리 민족의 그러한 기질을 살리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이어서 지도자와 국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묻자 강 목사는 “국민이 지도자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국민은 받은 사랑에 대해 천하의 존경심으로 응답을 해야 한다. 그런 관계가 생기면 된다. 그것만 이뤄지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답했다.

그리고 강 목사는 ‘정치꾼’과 ‘진짜 지도자’를 구분했다. ‘정치꾼’은 영어로 ‘폴리티션(Politician, 개인이나 당파의 이익을 위해 술책을 쓰는 정치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가는 ‘스테이츠맨(Statesman, 총명하고 식견이 있는 훌륭한 정치가)’이라고 했다. “그러한 진짜 지도자가 참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거지. 국민을 위해서 희생하고 나오는 그런 스테이츠맨이 나와야 사람들이 확 모인다 이거지.”

만약 지금 그런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미래의 지도자’를 키우자고 제안했다. “7년 후, 그게 안되면 12년 후에 나올 지도자들, 그럴만한 소질을 가진 사람들을 우리가 좀 키워줘야 한다. 그런 이들이 분명히 있다. 없지 않다. 그들이 (정치판의) 잘못된 바람을 바꾸질 못하고, 휘말려 들어가지 않도록 그들을 키워줘야 한다”고 강 목사는 거듭, 거듭 강조했다.

#역대 대통령들에게 해준 직언들

“역대 대통령들에게 어떤 직언을 했느냐”는 이승신 대표의 질문에 강 목사는 “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운을 뗐다. “그때부터 지금껏 유명한 정치가들을 안 만난 사람이 없다. 그들에게 우리 민족의 저력을 얘기했다. 그 강한 신바람의 기질에 불을 댕겨야 한다고 말했다.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수근댈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에서 연로한 세대까지 다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88년께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총리직 제의를 받았다가 거절했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민심은 천심’이라고 여겼다. 국민은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다. 백성의 마음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어서 그는 허균이 말한 ‘세 가지 백성의 타입’을 예로 들었다. 첫째는 권력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사람들, 둘째는 사사건건 반대하고 불평하는 사람들, 셋째는 잘하는 건 칭찬하고, 잘못하는 건 비판하는 백성이라고 했다. “셋째가 바로 ‘호민’이다. 이게 제대로 된 백성이다. 이들의 지지를 받으면 못 할 일이 없다. 대신 그들이 등 돌리면 별짓을 다 해도 안 된다.”

강 목사는 역대 대통령들에게 그걸 되풀이해서 역설했다고 했다. “그 말에 그들은 감명은 받았지만 실천을 하진 않았다. 결국 호민 계층의 얘기를 듣지 않고 자기들끼리, 소위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만 정치를 했다. 거기에 무슨 존경이 가며, 어느 국민이 따르겠는가.”

#한국의 미래

‘우리 나라의 전망’을 묻자 강 목사는 “이제는 굴뚝 문명의 산업화, 공업화 시대가 끝났다. 소위 앨빈 토플러가 말한 ‘제 3 물결의 시대’ 가 왔다”고 했다. 그는 그걸 ‘두뇌의 시대’라고 불렀다. “한국 사람은 돈이 없어 옆집에 쌀 꾸러 가는 일은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글을 몰라 글 꾸러 가는 건 창피하게 여기는 민족이다. 그래서 교육 수준도 높다.”

강 목사는 우리나라가 이제 ‘시기’를 만났다고 강조했다. “분단 국가에다, 자원도 별로 없는 나라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글로벌하게 잘 적응해야 한다. 민족주의로 고립되지 말고, 국제 관계 속에서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미래가 상당히 밝다고 말했다.

#꼭 하고 싶은 일

“남은 삶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물음에 강 목사는 “세상에 잘못 알려진 인물을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바로잡고 싶다”고 했다. “그런 인물이 누구냐?”고 하자 그는 ‘김재준 목사와 여운형 선생’을 꼽았다. “특히 2007년 7월19일은 여운형 선생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에 맞아 죽은 지 만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세상에 그분처럼 잘못 알려진 분이 없다. 그래서 그분이 세상 떠난 지 60주년에 그 작업을 하고 싶다.” 그러나 강 목사는 ‘2007년’을 맞지 못하고 타계했다. 그리고 ‘역사 속 인물 바로잡기’는 강 목사의 ‘못다한 과제’가 되고 말았다.

강 목사는 “우리 역사에도 진짜 스테이츠맨십이 있고, 신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며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몰락하고 말았다. 비명에 가고 말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나의 기도, 나의 믿음

강 목사는 “기독교 신자들이 기도를 도무지 잘 이해 못 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어떤 때 보면 무당 샤머니즘 같이 복을 달라고 빈다. 기독교의 기도는 그런 게 아니다.”

그는 프랑스의 테제 공동체에서 봤던 기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거기서는 기도가 ‘오~주여, 내게 오시옵소서’다. 그런 거다. 그러니까 지금 오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서 응답을 하는 거다. 그게 나와 하나님 사이의 기도다. 요란스럽게 소리지르고, 징징 울고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강 목사는 이 대표에게 “그런 기도를 배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어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하면 내가 저 사람들을 위해 살 수 있습니까. 내가 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뭔가”하고 물었다. 강 목사는 ‘요한복음’에서 한 구절을 꺼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와있고 내가 그의 안에 있는 것처럼, 나도 너희 안에 있으니 너희도 내 안에 있으라는 거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 얘기한 것도 그렇다. 지금까지 있던 ‘나 강원용’은 물러갔고, 그 대신에 내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살고 계시다는 뜻이다.”

#과학적 우주와 예수

강 목사는 과학적 우주관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신과 우주를 말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 천지만물이 뭔가. 몇 년 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약 1000억 개의 별들이 모여 은하계 하나가 되는데, 그런 은하계가 약 1000억 개 있다고 했다. 그 후에 1300억 개란 얘기도 나왔다. 최근에는 그런 매크로 코스모스(대우주)가 딴 데 또 있다고 한다.”

그럼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 걸까. 강 목사는 여기에 대해서도 답을 했다. 어떤 노인이 한 별에 앉아서 ‘이 놈이 저것하고 있구나’‘누구는 밥을 먹고 있구나’하는 식으로 볼 수는 없다고 했다. “탁자 위 꽃에서 느껴지는 어떤 에너지, 거기서 생명이 나오고, 아름다움이 거기서 나온다. 근원적인 하나의 사랑이 그런 에너지다.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고, 빛이 있다.”

강 목사는 요한복음에선 그걸 ‘로고스’, 구약에선 ‘말씀’이라고 했다고 했다. “결국 그러한 하나의 근원적인 힘, 우주 전체가 거기서부터 탄생되어진 그 파워가, 그 에너지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니 그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강 목사는 한 마디로 그걸 ‘맨 포 아더스(Man for others)’라고 표현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는 에너지,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성경은 온통 사랑 얘기다.”

◆여해(如海) 강원용(1917~2006) 목사는=기독교계의 ‘거목’이었다. 목사로, 사회운동가로, 방송인으로 활동했던 강 목사는 현실 참여에도 관심이 많았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 종교간 대화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유신에 반대하는 설교도 거리낌없이 했다. 또 민주화 운동을 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고인은 또 과학적 우주관을 수용,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표현도 종종 던졌다. 성서와 과학을 대칭점에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창조주의 숨결을 찾아보려 했던 ‘열린 신앙인’이기도 했다.

 1940년 일본 메이지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하고, 56년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경동교회 목사, 방송위원회 위원장, 세계종교인평화회의 명예의장 등을 역임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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