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장 혼란에 회사채 발행 어려워져 대기업도 은행 문 두드린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2면

채권시장이 요동치면서 은행에 이어 대기업들도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간 발길을 끊었던 은행에 다시 손을 벌리는 대기업들이 크게 늘었다. 회사채가 팔리지 않아 금리가 크게 오르면서 이자 부담이 커진 대기업들이 자금 조달 창구를 다시 은행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4일 금융계에 따르면 지난달 시중은행들의 대기업 대출이 갑자기 많이 늘었다. 우리은행은 11월 한 달에만 1조원 넘게 증가했다. 국민은행도 같은 기간 7000억원이나 늘었다. 두 은행 모두 올 들어 가장 많이 늘어난 것이다. 은행 관계자들도 어리둥절할 정도다.

한 은행 관계자는 “대기업들은 쌓아 놓은 돈도 많은 데다 설비 투자를 늘리는 추세도 아니어서 돈 쓸 일이 거의 없다”며 “그간 대출을 쓰라고 해도 쓰지 않던 대기업들이 제 발로 걸어와 대출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시중은행들의 대기업 대출 잔액은 50조3000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10조7000억원 늘었다. 이런 추세는 이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2004년 이후 매년 3조~4조원씩 줄어 온 것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실제 대기업들은 그간 현찰 보유를 크게 늘려 왔다.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매출액 상위 1000대 기업이 쓰지 않고 쌓아 둔 돈은 올 들어 364조원에 달했다. 자본금에 비해 쌓아 둔 돈이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는 내부 유보율도 600%나 된다. 외환위기 이후 현금 비중을 높여 온 대기업들로선 은행 돈을 쓸 일이 없었던 셈이다. 그런 만큼 최근 은행 대출을 늘린 것도 급전 마련보다는 장기적인 자금 조달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

우리은행 대기업심사팀 김희범 부장은 “대기업들이 그동안 자금을 조달해 온 회사채 시장이 불안해지자 여기서 조달하던 자금 일부를 은행 대출로 돌렸기 때문”이라며 “전체적인 자금 부족보다는 비축용의 성격이 짙다”고 설명했다.

최근 채권시장엔 은행들이 은행채를 쏟아 내면서 채권 값이 크게 떨어지고 금리가 급등하고 있다. 덩달아 회사채 금리도 크게 올랐다. 신용등급 AA-인 회사채 3년짜리 금리는 4일 하루에만 0.07%포인트 올라 6.53%를 기록 중이다. 대기업 입장에선 이런 고금리로는 채권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진 셈이다.

동양종금증권 류승화 연구원은 “채권시장의 혼란이 장기화하면 자금난이 벌어질 수도 있다”며 “이런 때를 대비해 현금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위험 분산 차원에서 은행 대출을 늘리는 대기업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한 대기업 금융회사를 예로 들며 “금리를 꽤 높게 제시해 안 받아들일 줄 알았더니 너무 쉽게 잡아채더라”며 “금리가 아무리 높아도 부쩍 고정금리를 요구하는 대기업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한국투자증권 최규삼 연구원은 “채권시장의 혼란이 금융권 전체로 옮겨간 셈”이라며 “그러나 곧 진정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은행의 과열 경쟁이 가라앉으면서 자금 조달도 곧 안정될 것”이라며 “이에 맞춰 채권시장의 혼란도 가라앉고, 대기업 대출도 안정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혜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