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 8.趙治勳.曺薰鉉 80년 첫 대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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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조남철(趙南哲)9단의 형인 조남석(趙南錫)씨는 4남3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조상연(趙祥衍)5단이고 막내가 조치훈(趙治勳)9단이다.또 장녀 복연씨의 아들이 강호 최규병(崔珪昞)7단이고 3녀 희연씨의 아들이 17세의 신예강자 이성재(李 聖宰)2단이다. 변산반도가 보이는 전북부안군 줄포에서 살던 趙씨 일가는 바둑계에 깊고 강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반포에 살고 있는 조남석씨는 지금도 외손자 한명을 프로기사로 만들기 위해 집념을 태우고 있다.
치훈은 56년 부산 피난시절 판잣집에서 태어났다.어느날 길을걷는데 점쟁이가 남석씨를 불렀다.새로 낳은 아들의 이름을 지으라 했다.우리집은 여자까지 모두 연(衍)자 돌림이라 했으나 고집스레 치훈이란 이름을 권했다.이 이름으로 대성 한다는 얘기였다. 고집불통 치훈은 김수영(金秀英)6단의 부친인 김탁(金鐸)씨의 지도를 받다가 여섯살때 조남철9단의 손을 잡고 일본에 건너가더니 80년11월 12년만에 드디어 명인(名人)이 되었고 그해말 금의환향하여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큰형 상연은 56년 고등학생때 프로가 된 기재(棋才)였다.
치훈이 조훈현(曺薰鉉)과의 기념대국을 위해 롯데호텔에 여장을풀었을때 상연은 치훈의 수호신처럼 곁에 있었다.치훈을 만나려면누구나 상연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숙부 조남철9단도 예외가 아니었다.외아들을 키워 성공시킨 홀어머니의 한이 랄까 경계랄까,자부심같은 것이 상연에게 있었다.서봉수(徐奉洙)는 나이는 어리지만 대가로서 존경해 마지않는 치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골머리를 앓고있는 어떤 바둑 수(手)에 대해 치훈이라면 답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만날 수 있는가 물었다.
상연은 만날 수는 없고 기보(棋譜)로 적어서 보내라고 했다.
서봉수는 그렇게 했다.
조남철9단은 내심 분노했고 한국기원쪽 프로기사들은 한국바둑계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점차 조치훈에게 보내던 환호를 멈추고 한발 물러섰다.
치훈이 한국기원을 방문하지 않은 것에도 속이 상했다.『대성했으면 찾아와서 후배들도 격려해야 마땅하지 않은가』하고 드디어 분노의 일성이 터져나왔다.치훈 덕분에 붐이 일어나 바둑책은 많이 팔렸지만 양측은 이때부터 감정의 골이 깊게 패 기 시작했다. 조훈현과 조치훈의 대국에서 대국료가 엄청나게 차이가 난 것도 자존심에 불을 질렀다.
『치훈이야 바둑만 두지 뭘 아나.다 조상연 탓이지.』치훈에 대한 서운함까지 모두 상연에게 넘겨졌다(이것은 뒷날 상연이 바둑책 발간등 별도 법인체 설립에 나서자 한국기원이 그를 프로기사에서 제명해 버리는 사태로 이어진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3천만원의 돈을 받고 치훈은 두판을 두어 조훈현을 두번 다 꺾었다.승부를 떠나 나타난 실력은 비등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많은 사람들이 내게 조심스럽게 묻곤했다.『실제 치수는 혹 2점쯤이 아닐까요』 라고.
한국 1인자는 세계 1인자에게 턱도 없다는 일반의 정서가 바둑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이때가 조훈현에겐 최악의 시절이었다.국내를 통일했으나 지푸라기만 잡은 것같은 허전함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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