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송씨 할머니는 왜 한글을 배우실까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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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우유 배달하는 할아버지 김만석과 파지 줍는 할머니 송씨, 주차장 관리원 군봉과 치매에 걸린 그의 아내. 일흔 고개를 넘긴 네 노인의 사랑을 그린 강풀(33·본명 강도영·사진)의 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문학세계사)가 출간됐다. 노인들만 잔뜩 나오는 만화가 무어 재미있겠냐 생각하면 오산이다.

연애편지를 읽으려고 한글을 배우는 송씨 할머니, 그런 송씨를 위해 그림 편지를 전하는 만석 할아버지의 사랑은 10대들의 그것 못지않게 풋풋하고 귀엽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먹이고 씻기며 보살펴 주고, 마지막 길까지 함께 가려는 군봉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에 젊은이들의 알량한 사랑을 견줄 수 있을까. 이 특별한 사랑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된 걸까.

강풀에겐 할머니가 있다. 아흔을 훌쩍 넘겼지만 정정하던 할머니는 지난해, 죽음의 문턱을 넘어갈 뻔했다. 큰병도 아닌, 고작 감기 때문이었다.

“언젠간 이런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일 이후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에게도 ‘노인은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이 있었다. 그런데 서른 줄에 들어 할머니를 가까이 모신 뒤 생각이 달라졌단다.

“할머니께 귀여운 면이 많더라고요. 동네 친구들이랑 칼국수 드시러 갔는데 누가 쐈다고 자랑하시고, 가끔 아버지 흉도 몰래 보시고….”

만화 주인공들도 하나같이 귀엽다. 만석 할아버지는 선물로 받은 가죽 장갑을 자랑하고 싶어 만나는 사람 마다 어떻게든 ‘장갑’이란 단어를 꺼내게 만들고, 송씨 할머니는 매번 배탈이 나면서도 할아버지가 주는 우유를 꼬박꼬박 받아 마신다.

그렇게 귀엽게 사랑을 주고받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던가. 친구의 죽음을 바라보며 “우린 지금 죽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라고 자조하는 만석 할아버지의 대사가 가슴 찡하다.

만화는 출간에 앞서 인터넷 포털 ‘다음’에 연재됐다. “덕분에 부모님·가족을 돌아보게 됐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주로 “감사하다”는 내용이 많다. “젊은 작가가 어떻게 이런 작품을 그렸느냐”는 어르신의 소감도 종종 눈에 띈다.

강풀은 “살면서 봐 온 것들을 담았다”고 말했다. 고3 및 재수·휴학 시절 등 3년간 신문을 배달하면서 만났던 새벽 우유배달부가 김만석이란 캐릭터로 태어났다. 너무 흔해 무심히 봐 넘기던 파지 줍는 할머니도 그의 만화에선 특별한 캐릭터가 됐다. 의리에 죽고 사는 주인공들의 성격은 그를 닮았다. 그는 한 출판사에서만 책을 낸다. 작업실도 없이, 인터넷과 전화도 끊겨가며 ‘살아 보겠다고 인터넷에 똥이니 뭐니 더러운 만화를 그리던’ 6년 전, 조건 없이 1000만원을 주고 간 출판사 대표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이다. 지난해 일곱 살 연하의 김혜정(26)씨와 결혼해 알콩달콩 연애하듯 사는 정서도 만화에 담겼다.

“아내가 재미있어 하고, 제가 재미있을 때까지 다듬어요. 그럼 대중적으로도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죠.”

강풀은 대중의 코드를 가장 잘 건드리는 만화가로 꼽힌다. 『아파트』는 이미 영화로 만들어졌고, 『26년』『순정만화』『타이밍』도 스크린에 옮겨진다. 지금은 다른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그래서 차기작은 내년 봄께 나올 예정이다.

“멜로를 그리다 보면 착해지는 느낌이 들고, 그러다 보면 다시 사악한 호러물을 그리고 싶어지죠. 다음 작품은 호러가 될 것 같아요. 그런데 멜로든, 호러든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더라고요.”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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