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랑>칠집 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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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내가 사는 봉천동은 훈훈하다.
5년 넘게 이곳에 작업실을 정하고 사는 까닭에 이웃들과도 눈인사를 하게 되었고 노트에 바를 정(正)자를 그어놓고 식사를 하는 「함바집」에 드나드는 사람들과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나누게 되었다.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공사장 인부들이어서 저마다 자기노트를 비치하고 있는데 겉장에는 각자의 글씨로 「미장 이씨」「목수 오씨」등의 글씨들이 투박하게 쓰여있다.이것을 흉내내어 나도 나의 노트에 「칠집 김씨」라고 장난삼아 써넣 었는데 5년여를 그곳에 들락거리다 보니 내 호칭은 자연스럽게 「칠집 김씨」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물감이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그곳에 드나들기 때문에 「칠집 김씨」야말로 딱 맞는 호칭인 셈이었다.어느 날은 식사를하고 나오는데 식탁을 훔치던 주인 아주머니가 『김씨 바쁘지 않으면 저거 좀 써주실까?』해서 보니 벽에 너풀거 리는 메뉴판 글씨였다.
물론 그날 오후는 메뉴판 글씨를 써준 덕분에 바를 정자는 긋지 않아도 되었다.이런 모든 일들이 나는 즐거웠다.
그곳에서는 투박한 삼남(三南)의 사투리나 심지어 걸찍한 욕지거리마저 건강하고 싱싱하였다.무지막지한 식욕 틈에 끼어 나도 덩달아 한그릇씩의 밥을 비우곤 했다.
손톱만한 자의식을 과장되이 확대하는 삶의 사변적 취향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칠집 김씨로 불릴 때마다 적어도 「미장 이씨」나 「목수 오씨」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그리고 정직하게 칠해 나가야 하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말이지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미친듯 칠하고 또 칠하는 참다운「칠집 김씨」가 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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