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책읽기] 고이즈미 VS 아베 … 그들의 성패는 말투에서 갈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아즈마 쇼지-1956년 이시카와현 출생. 와세다대학 졸업 후, 텍사스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 취득. 전공은 사회언어학. 유타대학교 언어문학부 및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교수. 각계 유명인들의 말을 분석하는 ‘언어탐정’을 자임한다. 저서에 『사회언어학입문』『바이링걸리즘』『역대 수상의 언어력을 진단한다』 등이 있다.

言語学者が政治家を丸裸にする
(언어학자가 정치가를 발가벗기다)
아즈마 쇼지(東照二) 지음
文芸春秋사,
271쪽, 1699엔

“자민당을 송두리째 바꾸겠다. 바뀌지 않으면 깨부수겠다.” 지금부터 6년 전 자민당 총재선거에 나선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입에서 나온 서슬 퍼런 출마의 변이다. 일본 정가에 이 정도 험한 말이 정치구호로 등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지만, 그는 78%라는 역대 최고의 지지율과 함께 87대 일본수상 자리에 올랐다.

정치적 기반이 전무했던 ‘괴짜정치가’ 고이즈미가 수상이 되고, 또한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대중의 전폭적 지지 덕이다. 대중은 왜 고이즈미를 지지했는가. 반면에, 고이즈미와 정치성향도 비슷한데다 전임자의 강력한 후원을 얻어 후임 수상이 된 아베 신조는 왜 단명했는가. 이 책의 저자에 의하면, 두 사람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한 것은 말의 힘이다.

미디어정치 시대에 말은 정치지도자의 대중적 이미지를 좌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이즈미와 아베의 연설, 기자회견 발언을 분석해서 정치현상에 대한 사회언어학적 해명을 시도한다.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기시(岸) 전 수상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역대 수상들은 대체적으로 연설을 중시하지 않았다. 일본의 정치가들은 의회 내에서 주고받으며 몸에 익힌 ‘그들만의 언어’로 일반대중까지도 상대해왔다. 그러나 고이즈미의 어법은 달랐다. 그가 사용하는 문장은 간결하고 명료하다. 유형화된, 이른바 정치가말투를 버리고, 일반대중의 일상 언어감각에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담고자 했다. 아울러 고이즈미는 짧은 단문으로 된 ‘한 마디 정치’의 고수이다. 그런 단도직입적인 메시지가 일반에게 참신하게 받아들여진 이유도 일반대중이 사용하는 ‘우리들 언어’로 말을 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언어학자 데보라 테넌의 이론을 응용해서 고이즈미가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배경을 찾는다. 대화형식은 의사전달 위주의 보고형 방식(report talk)과 공감을 중시하는 상호관계형 방식(rapport talk)으로 나뉘는데, 고이즈미의 화법은 후자에 속한다는 것이다. ‘-인 것입니다’라는 식의 남성적이고 권위적인 보고형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해 온 정계 관행에서 벗어나 고이즈미는 지적 논리보다는 정서를 공유하는 표현으로 유권자를 끌어들인다. 쌍방통행의 소통효과를 거두기 위해 의문형을 즐겨 사용하며, 연설 속에서도 논리와 감정, 공적·사적 어법을 유효적절하게 병용하기도 한다.

저자에 의하면, 아베는 고이즈미 어법을 철저히 연구해서 간결명료한 취임 연설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벼락치기 학습효과는 곧 바닥이 나는 법.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베의 말투는 단조로운 일방통행식 정치가 말투로 돌아왔다. 인터뷰 때 고이즈미의 한 문장 평균 어절(語節) 수는 5.4개, 아베는 그것의 배가 넘는 11.1개였다. 단, 아베의 문장이 역대 수상의 그것에 비해 특별히 긴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의 불행은 전임자가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빈틈없이’ ‘열심히’라는 부사를 연발하는 아베의 모범생 말투가 유권자들에게는 어느새 판에 박힌 정치가 ‘그들만의 언어’로 비춰진 것이다.

취임 후 실시한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는 참패했다. 전후 최연소(52세) 수상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그의 언어는 일반대중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아베는 고이즈미가 열어놓은 미디어정치시대의 첫 번째 희생자인 셈이다.

정치의 계절이다. 5년간 담아놓았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정치가에게 말은 생명이다. 말을 들춰보면 정치가 보인다.

윤상인<한양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