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쓴소리] 숨 막히는 교양, 불편한 오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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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을 마시는 데 에티켓이 필요합니까.”

필자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의 하나다. 애매하기 짝이 없다. 필자가 외국에서 와인을 배우고, 마시기 시작했을 때 똑같은 질문을 와인 선생에게 하곤 했다. 대답은 대체로 비슷했다.

“글쎄. 뭐라 답할 게 없는 걸. 그저 편하게 마시는 게 제일이지.”

종주국에서 평생 와인을 다루고 사는 와인 프로들의 대답이 그랬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와인 책이건, 와인 강좌건 아주 명료하게 대답한다. 뜻밖이다.

“와인 잔의 몸통(보울)을 잡으면 안 됩니다. 다리를 잡으시고, 먼저 잔을 돌려서 향을 음미하세요. 그리고 아주 조금씩 입안에 흘려넣고 ‘훕!’하고 공기를 들이마셔 입안에서 함께 굴려 보세요….”

틀린 설명은 아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순전히 와인 전문가들이나 하는 시음법일 뿐이다. 와인 인구의 0.001%나 될까 말까 한 소믈리에, 와인감정사에게나 필요한 테크닉이지 필수 교양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이 한국에서 마치 누구나 알아야 할 교양으로 둔갑했다. 과잉이 흔한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해프닝이다. 뒷산 오르는 데 히말라야용 장비를 갖추고, 막 노출 배운 이가 라이카 수동카메라 풀세트를 사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런데 유독 ‘과잉’이 흔한 곳이 일본과 한국인인 걸 보면, 아마도 지금 우리 와인 문화를 지배하는 에티켓이라는 것도 서양 아닌 일본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 와인 문화가 없던 시절, 소믈리에들이 주로 일본에서 연수를 받은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도대체 와인잔은 왜 다리를 잡고 마시라고 할까. 서양의 어떤 텍스트에도 일반 교양으로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필자는 아주 우연히 의미있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우리 대통령 내외와 서양의 대통령 내외가 만찬 건배를 하는 장면이었다. 특이하게도 우리는 와인잔의 자리를 점잖게 잡고 있는 반면, 그들은 몸통을 잡고 있는 게 아닌가. 만약 다리를 잡는 게 필수적인 교양이라면 그들은 한국을 얕보고 외교적 결례를 범하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다. 시간이 되시면 ‘만찬&건배&대통령’ 정도의 검색어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시라. 수없이 등장하는 이탈리아·프랑스·미국·영국의 정상과 외교사절들이 저지르는 ‘결례(?)’를 목격하실 수 있을 것이다.

뭔가 우리는 외래문화에 주눅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외국 대통령도 안 지키는 예절을 우리가 수수한 대중식당에서조차 지키고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식당에서 와인을 종종 서비스하는 필자는 좀 당혹스러워진다. 주문한 와인이 도착하면 도란도란 나누던 대화가 뚝 끊기고 필자를 주목한다. 종갓집 기제사 같다.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다. 그리고 와인을 분배하면 또 하나의 숨막히는 ‘교양’이 남아 있다. 앞서 말한 복잡한 와인 테이스팅을 대부분의 손님들이 ‘실천’하고 있는 광경이다. 그뿐 아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쉼 없이 와인잔을 돌리면서 음미한다.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얼음이나 물 타서 마시지 마라, 레드와인은 차게 해서 마시면 안 된다, 개봉한 와인은 즉시 마셔 버려라, 등 어느 것 하나 예절 아닌 예절이 와인 문화에 깃들어 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지면 불편해진다. 이미 우리 깊숙이 들어온 와인, 좀 편하게 마셔도 될 일인데 말이다. 예절이라고 배운 것이 오히려 결례가 되는 지금의 이 해프닝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자못 궁금하다.

글쓴이 박찬일은…

『와인 스캔들』의 저자.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을 전공했다. 이탈리아에서 요리와 와인을 공부하고 지금은 서울 청담동 레스토랑 '뚜또베네'의 메인 셰프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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