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줄 알았지, 근데 기탁금 5억이 안모이더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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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통령선거 후보 등록이 26일로 마감돼 청와대 입성을 위해 뛸 주자가 12명으로 결정됐다. 지금껏 최다 출마 기록이다. 하지만 이 뒤에서 씁쓸한 웃음을 짓고 돌아선 예비 후보들이 무려 140여명. 정치 신인의 선거운동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2004년 도입한 예비후보자 등록제 실시로 총 155명이 대선 예비후보 등록을 했지만 90% 이상이 최종 후보 등록의 문턱은 넘지 못했다.

이들은 왜 대통령 후보 등록까지 가지 못했을까. 정당인을 제외한 무소속 후보자 중 13명을 무작위로 골라 연락을 시도해본 결과 통화가 된 10명 가운데 10명 모두가 “기탁금이 없고 추천장을 못 받았다”고 말했다. 등록 자격 요건인 기탁금 5억원과 추천장 5000매가 없어서다.

◇“독지가를 기다렸지만….”=혈혈단신으로 대통령 후보에 나서기 힘들다고 판단한 무소속 예비후보 60여명은 ‘무소속연대’를 만들어 대통령의 꿈을 키웠지만 첫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자신을 미국 중앙정보국 극동 담당 요원 출신이라고 소개한 김사백(55ㆍ무직)씨는 ‘가난한 사람도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지난 6월 예비 후보에 등록했다. 그러나 그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등록은 했지만 기탁금과 추천장을 모으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며 “예비 후보로 뛰면서 기탁금을 내 줄 독지가를 기다렸지만 나타나지 않아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 나라와 비교해 기탁금이 너무 비싸 정치 입문의 통로가 너무 좁다”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지난 4월 예비 후보 등록 첫날에 일찌감치 후보 등록을 한 박노일(52ㆍ농업)씨는 ‘농촌 사람들도 잘 살자’는 모토로 활동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역시 기탁금과 추천장 부족 때문이다. 박씨는 “여러 행사를 다니며 얼굴을 알렸지만 개인 사정상 최종 출마까지는 하지 못했다”며 “특별한 의미는 없었고 한번 출마해보고 싶어서 나갔지만 이젠 농사일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넷 블로그로 선거운동을 한 조화훈(55ㆍ전 보험사 본부장)씨는 국민재산 형성 시대의 개막, 한미동맹 강화, 공기업 수술, 예비군 훈련 폐지 등의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기탁금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정책을 개발하고 홍보하는 고생을 또 하고 싶지 않다”며 “이번 한번으로 끝내겠다”고 덧붙였다.

이창우(63ㆍ택시기사)씨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기존 정치인에 대한 불신으로 내가 대통령이 되면 다 몰아내려 했다. 기사식당과 택시를 타는 손님에게 3000여장의 명함을 돌리며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기탁금을 후원하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며 “역시 정치는 돈,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곽희용(45ㆍ소설가)씨도 ‘세계 7대 강국-3억5000불 소득시대 열겠다’는 구호로 명함을 돌리며 얼굴 알리기에 힘썼으나 역부족이었다. 곽씨는 “돈의 벽이 높았고 추천장을 모으는 것도 한계가 있어 포기했다”며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70대 때까지 계속 후보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예비후보 등록 무성의=첫 시행된 대통령 선거 예비후보 등록제 시행이 아직 시기상조라는 지적이다. 등록 요건이 너무 쉬워 정치 신인 통로는 고사하고 유권자에게 누가 나왔는지도 제대로 알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내 5년 이상 거주한 40세 이상인 사람 중 주민등록초본과 호적초본 1통씩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면 예비 후보로 등록이 가능하지만 이중 90%가 최종 등록은 포기했다. 후보 등록시 기탁금과 추천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쩌다 보면 구할 수 있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예비후보들이 다수였다.

후보자 난립으로 좋은 취지로 만든 제도가 무색해질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서강대 이현우(정치외교학) 교수는 “등록자의 자격 요건을 후보등록제보다는 낮은 수준으로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며 “예비 후보자 등록 때 일정 수의 선거권자로부터 추천을 받도록 하거나 많지 않은 일정액의 기탁금을 납부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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