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탈출 사투끝에 찾은 자유-극적 귀향 조창호씨 스토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6.25 참전용사의 43년만의 귀향은 성성한 백발과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살 만큼이나 한맺힌 것이었다.연세대생→포병소위→중공군포로→북한억류→탄광생활에 이어 23일 서해바다 한가운데서극적으로 구조된 조창호(趙昌浩.64)씨.
서울중앙병원에서 누나 조창숙(趙昌淑.74.前건국대가정대학장)씨와 동생 조창원(趙昌源.61.美필라델피아거주)씨,이종사촌형의아들인 C일보 崔모기자등 친척을 만난 趙씨는 뇌졸중에 따른 언어장애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채 하염없이 눈물 만 흘렸다.
『죽은줄로만 알았던 창호가 살아 돌아오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趙씨의 엑소더스는 지난3일 밤에 이뤄졌다.
『몸이라도 고국에 묻자.』 탈출기도죄로 붙잡혀 아오지.원산.
강계교화소등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13년동안에도,탄광 막장생활에서 얻은 진폐증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자유.
이같은 끝없는 자유에의 갈망은 노구(老軀)의 趙씨를 압록강가로 이끌었고,한조각 쪽배에 희망과 신념을 싣고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의 다롄(大連)항에서 탈출선을 구하기 16일간.드디어 19일 중국교포의 주선으로 목선을 얻어 탔으나「자유의 문」은 그에게 또한번의 인내를 요구했다.
갑자기 거칠어진 파도때문에 1차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운명의 22일 새벽,趙씨는 다시한번 자유의 문을 두드렸고 23일 새벽수산청소속 어업지도선에구조돼「백발의 귀향」에 성공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창호가 육군에 입대하겠다며장교시험을 치른다고 말했을때 온 식구가 장남을 전쟁터에 내보낼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평소 의협심이 워낙 강했던지라 도저히 말릴수가 없었어요.』 누나 창숙씨에 따르면 평양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할아버지의 장손으로 유복하게 자란 趙씨는 50년 연세대 문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운명의 6.25는『나라가 어려운데 무엇하느냐』는 어머니말씀과 함께 趙씨를 전장으로 떼밀었다.50년12월 서울창덕궁에서 장교시험을 치르고 부산으로 부모님과 2남5녀가 피난한뒤 이듬해 2월 부산동래소재 군부대로의 입영.
이로써 이들 오누이의 43년동안에 걸친 생이별이 시작된 것이다. 趙씨는 육본직속의 포병101대대 관측장교(소위)로 참전했고 가족들은 3개월쯤 지나 보병사령부로부터 趙씨가「51년5월15일 강원도인제 전투에서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다 낙오된 부하를구하기 위해 적진에 다시 들어갔다가 포로가 된 것같 다」는 통지서를 받은 것이 끝이었다.이러한 사실을 알지못하고 40여개 성상이 흐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의 귀환을 기도하던 어머니는 82년에,아버지는 이보다 훨씬 앞서 7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실종된지 25년이 지나는 바람에 자동 전사처리된趙씨도 77년 국립묘지 영현봉안관에「중위」로 승진된채 위패에 새겨졌다.「육군중위 조창호,카드번호 47-8-052,51년9월10일 사망.」 『그동안 이산가족 재회추진사업이 벌어지고 남북적십자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돼 남북간 인적왕래가 이루어지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이제야 병든 몸으로 돌아오다니….』 누나 창숙씨의 오열은분단의 아픔 그자체였다.
〈朴鍾權.金東鎬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