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아의 말하기 칼럼] 잘못된 말은 자승자박 초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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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27면

이틀 전인 11월 23일은 20세기 폴란드가 배출한 걸출한 작곡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의 74번째 생일이었다. 공산 독재정권 시절 소련 권부에 개의치 않는 작품들을 써냈던 펜데레츠키는 폴란드 연대자유노조(solidarity)의 위탁을 받아 1970년대 반정부 저항운동 중 숨져간 이들을 기리는 라크리모사(lacrimosa)를 작곡해 훗날 폴란드 레퀴엠으로 확장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그에게 작곡을 위탁한 연대노조 최초의 의장이 바로 레흐 바웬사다.

조선소 전기공으로 노조 결성을 주도했던 바웬사는 민주화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해 폴란드 최초의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83년엔 인권과 자유를 위해 싸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바웬사. 그런데 그는 말을 못하기로 유명했다. 다른 정파에서 바웬사의 말에 반대 의견을 낼 수 없었던 것은 ‘바웬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오늘날과 같은 미디어 선거 시대에 말을 잘하는 정치인과 못하는 정치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선 말을 잘하는 데에는 어떤 표준화된 틀이 있지 않다. 유창하게 술술 말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좋아지는 것은 아니며, 투박하게 한두 마디 던지며 조용히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우스워지진 않는다. 조용한 가운데 던지는 말 속에 진정이 배어 있으면, 유창한 말 가운데 세상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느껴진다면, 그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말하기에 황새와 뱁새가 따로 있지 않으니 누가 누구를 쫓아 하다가 혀 꼬이고 몸 다칠 일이 아니다. 유창미, 투박미, 비장미, 성실미… 모두 나름의 매력이 있다. 유전자와 경험이 다른 사람의 말이 주는 미감은 이토록 다양하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말하기를 선택하고 거기에 담을 내용을 고민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말을 잘 못하는 경우를 가려내는 데에는 어떤 표준화된 틀(가늠자)이 있어 보인다. 거짓말, 진심이 아닌 판에 박힌 말, 다른 사람 상처 주기 위한 말, 실은 의견이면서 사실인 척하는 말, 안 해야 할 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 했던 말 또 하는 말, 치명적인 오류를 담은 말 등이다. 최근 들은 말 가운데 대표적으로 잘못된 말, 자체적으로 치명적인 오류를 담은 말을 예로 들어보겠다.

“그 말은 반대 진영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의 오류는 크게 3가지. 첫째, 말의 내용을 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의 성향만으로 말을 반박한 점(ad hominem, 인신공격). 둘째, 자신의 소망을 사실로 치환해 듣는 이를 교란시킨 점(그는 신뢰하고 싶지 않아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셋째, 결국 이 말은 하나의 진영 사람인 자신의 말 또한 반대 진영 사람의 말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신뢰를 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는 꼴이다.

반대 진영의 사람은 그 입장에 충실한 말만을 할 것이라 추정한 그 말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입장에 충실한 말만을 하고 사는 것이라는 사고로 확장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그 말을 하고 있는 자신도 자신의 진영에 충실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일 뿐 객관적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그는 진정 몰랐을까, 이 자승자박의 근거를.

만약 나도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민주주의 정당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표현은 ‘성급한 일반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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