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식 미스터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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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호 15면

일러스트 강일구

TV의 각종 시상식을 보고 있노라면 “미스터리야”를 연발하게 된다. 도대체 “엄격한 심사과정과 시청자들의 투표를 거쳐” 내놓았다는 수상 결과는 왜 저런지. “오직 이 시상식에서만 볼 수 있다”는 스타들의 합동 공연은 왜 김이 팍팍 빠지는 건지. 신동엽 같은 최고의 MC들을 데려다 놔도 왜 썰렁하기만 한 건지. 마지막으로 “그렇게 하려면 때려치워!” 욕하면서도 나 같은 시청자는 왜 시상식만 하면 채널 고정이 되는 건지.

이윤정의 TV 뒤집기

시상식이 좋은 건 한 해의 좋았던 기억을 돌이킬 수 있고, 상 받는 사람의 기쁨을 나누는 감동이 있고, 늘 따로 놀던 스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면 뭔가 다른 그림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다. ‘쇼’가 갖춰야 할 좋은 재료를 다 가지고 있다. 원론적으론 그렇다.

하지만 올 연말에도 그런 기대감은 없다. 연기대상, 연예대상, 코미디대상, 이름만 바꿔가며 자축 파티를 하는 방송사들은 각 부문 대부분에 공동 수상 결과를 내놓을 것이고 많으면 서너 명에게 상을 같이 줄 거다. SBS에선 ‘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 아니면 ‘쩐의 전쟁’의 박신양이 대상일 거고, MBC에서는 ‘태왕사신기’의 배용준일 거다. 가장 궁금한 건 누가 베스트 드레서로 꼽히느냐 정도다. 권위를 상실해버린 영화제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김혜수가 얼마나 섹시한 옷을 입고 나올까’ 정도가 돼버린 마당 아닌가.

지상파 방송사들의 가요대상이 무의미해진 마당에 가장 큰 시상식이 된 엠넷의 ‘MKMF’ 시상식이 17일 열렸다. 무려 31개 부문에서 상을 뿌려 댔지만 팝 발라드 가수인 SG워너비에게 ‘R&B 솔상’을 안기는 해프닝에, ‘엠넷닷컴상’ ‘네티즌 인기상’ ‘모바일 인기상’ 같은 차이를 모를 상들 때문에 누가 무슨 상을 받았는지 관심도 가지 않았다. 신혜성과 이민우가 ‘공정성’을 이유로 불참했다는데도 ‘언제는 안 그랬느냐’ 싶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단지 바라는 것 하나는 제발 볼 만한 무대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것인데 그마저 외면당한 느낌이다. ‘원더랜드’를 테마로 한 시상식 쇼는 ‘원더걸스’를 비롯한 소녀 그룹들이 김범을 가운데 앉혀놓고 유혹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김범의 얼굴을 보여주는 걸 연출 무대라고 내놓았다.

하이라이트는 음악 시장을 살리자는 의도로 드렁큰타이거·에픽하이·서인영·클래지콰이·안흥찬까지 여러 장르의 뮤지션이 같이 ‘뮤직 이즈 러브’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엉성한 편곡으로 일관성도 없고 산만한 연출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게다가 마지막에 ‘악성 댓글 이제 그만’ ‘불법 다운로드 이제 그만’이 적힌 플래카드가 내려오는 장면에서는 무슨 시골 체육관의 동네 단합대회를 연상케 할 정도로 실소를 자아냈다.

그래미나 아카데미에서 한 번이라도 상을 받으면 평생 ‘오스카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꼬박꼬박 붙을 정도로 권위도 있고, ‘에미넘과 엘튼 존’의 공연처럼 두고두고 기억되는 무대를 만들어 내는 외국 시상식을 보면 ‘사대주의’ 근성이 발동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우리 시상식에 바라는 것? 이제 권위는 바라지도 않고 공정성은 꿈도 안 꾼다. 그저 시상식 중계되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즐길 수 있는 ‘쇼’라도 해달라는 것이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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