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 인수, 국내자본도 뛰어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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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외국계 펀드들의 독무대였던 '기업 리모델링 시장'에 토종 자본들이 속속 뛰어들고 있다. 기업 리모델링이란 부실 기업이나 실체에 비해 저평가돼 있는 회사의 지분을 인수해 회사의 가치를 높여 되팔거나 경영하는 것을 말한다. 법정관리.워크아웃 기업만 인수할 수 있는 기업구조조정 기금(CRC)과 인수대상에 제한이 없는 사모 인수.합병(M&A)펀드.사모주식투자 펀드(PEF)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외환위기 이후 칼라일(한미은행).뉴브리지(제일은행).H&Q(굿모닝증권).론스타(외환은행) 등 외국계 펀드들은 국내 기업들을 인수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토종자본 속속 진출=지난해 처음으로 법정관리.워크아웃 기업 인수에 자금을 배정했던 국민연금은 올해 자금 배정 규모를 늘렸다.

국민연금은 지난해보다 25% 늘어난 1천5백억원을 기업구조조정 기금으로 책정했다. 이와 함께 사모주식투자펀드와 선박펀드 등에 1천5백억원을 투입한다. 또 그동안 벤처 투자에 주력했던 KTB네트워크는 벤처 투자비중을 줄이는 대신 기업 리모델링 부문에 집중하기로 했다. KTB네트워크는 지난해보다 세배 늘어난 2천8백억원을 투자하는데, 이 중 1천8백억원은 부실 기업을 인수하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1천억원은 벤처기업에 투자할 계획이다.

올해 모두 7천억원의 펀드를 조성할 계획인 미래에셋은 11일 현재 2천억원을 확보했다.

미래에셋은 이중 5천억원으로는 한국투신.대한투신 인수를 추진하고, 2천억원은 저평가된 기업 5~6개를 인수해 되팔 계획이다. 미래에셋증권 최현만 사장은 자금 조성을 위해 국내 15개 연기금과 은행 등을 상대로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고 있다.

삼성증권 황영기 사장은 올해 1조원대의 사모펀드를 조성해 법정관리 기업이나 저평가된 기업을 인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누가, 왜 하나=무엇보다 기업 리모델링 시장의 수익성이 좋기 때문이다.

벤처 투자로 적자를 볼 뻔했던 KTB네트워크는 지난해 단 한건의 대형 거래 덕분에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다. 이 회사는 팬택과 함께 인수한 팬택앤큐리텔의 지분을 팔아 7백70억원(컨소시엄 전체 이익은 9백76억원)의 차익을 냈다. 덕분에 벤처 투자 부문에서 3백50억원의 적자를 내고도 지난해 흑자로 돌아섰다.

KTB네트워크 권오용 상무는 "벤처 투자는 씨앗을 뿌려서 수확을 해야 하지만, 법정관리 또는 워크아웃 기업들은 최소한 수익모델은 갖고 있는 기업"이라며 "법정관리 기업을 인수하는 게 벤처 투자에 비해 성공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군인공제회는 칼라일이 한때 인수를 추진했던 금호타이어를 인수했다. 군인공제회의 한 관계자는 "3년 후쯤 금호타이어를 증시에 상장시켜 투자 이익을 회수할 계획"이라며 "이런 투자를 하지 않으면 수익률을 맞추기 힘들다"고 말했다.

◇성공 조건은=KDB파트너스 우병익 사장은 "치밀한 계획과 전문 경영인이 없는 상태에서 부실 기업을 인수하면 오히려 그 회사를 더 망칠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일부 구조조정기금 펀드들은 아무런 계획 없이 코스닥 기업을 인수했다가 회사 공금을 횡령하거나 주가를 조작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미래에셋증권 崔사장은 "미래에셋은 올해 인수할 회사를 꾸려나갈 전문 경영인을 이미 물색해뒀다"며 "기업 리모델링이 성공하려면 기업구조조정 기금과 사모M&A펀드 등은 자금관리 역할만 맡고, 회사 경영은 전적으로 전문 경영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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