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법률 산책] EU 사법재판소, 폴크스바겐법 무효 판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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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13면

포르셰 자동차의 창업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1934년 히틀러에게 불려가 5인 가족이 넉넉히 탈 수 있는, 고장이 적고 기름을 덜 먹는 차를 개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딱정벌레 모양의 폴크스바겐 비틀이다. 폴크스바겐은 히틀러의 국민차 기업 프로젝트에 따라 탄생한 독일의 국영기업으로, 유럽 최대의 자동차 그룹이 됐다.

이후 독일 정부는 1960년 폴크스바겐을 민영화하면서도 국민기업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폴크스바겐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대주주가 아무리 지분을 많이 매입하더라도 의결권을 20%까지만 행사하도록 제한하고, 독일 정부가 이사회의 이사 2명을 선임할 수 있도록 해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부터 회사를 방어하는 장치를 마련해뒀다.

그런데 최근 유럽연합(EU) 사법재판소는 폴크스바겐법 조항이 무효라고 판결했다. 독일 정치인들과 노동조합은 근로자의 고용안정을 위해 이 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U사법재판소는 “독일 정부가 폴크스바겐의 지분을 유지함으로써 그들의 근로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으며, 폴크스바겐법이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저해한다”고 판시했다.

이와 함께 법원은 주요 주주인 독일연방정부와 로베르작센 주정부가 회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의욕을 꺾는 차별적인 요소가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연방정부와 로베르작센 주정부의 이사 2인 선임권도 부정했다.

이로써 폴크스바겐의 지분 31%를 확보하면서 폴크스바겐 인수의 꿈을 키우고 있는 포르셰에 날개를 달아주게 되었다. 포르셰는 폴크스바겐의 지분을 내년 초까지 50%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페르디난트 포르셰가 폴크스바겐 비틀을 개발한 이후 80여 년 만에 포르셰가 매출액에서 14배나 큰 폴크스바겐을 인수하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이번 판결은 주요 회사들에서 황금주(golden shares)를 갖고 있는 유럽연합 정부들과의 일련의 싸움에서 EU 집행위(European Commission)가 거둔 승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U 집행위는 2005년 폴크스바겐법 때문에 독일 정부를 법정에 세운 이래 에너지회사 보호정책을 편 스페인, 고속도로 회사에 대한 인수합병을 방해한 이탈리아, 그리고 이탈리아계 은행의 자국 내 은행에 대한 합병을 방해하던 폴란드를 제소했다. 유럽연합 국가 어느 곳에서나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권리와 같은 기본적인 경제적 자유를 선언한 EU 조약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런 싸움을 지속한다고 집행위는 밝혔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금융감독원은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수단으로서 포이즌 필(Poison Pill: 독약증권 혹은 신주예약권)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재경부는 M&A 시장의 활성화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기업들이 적대적 M&A를 방어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비용을 지불하게 돼 기업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 도입을 주장하는 측의 논거다. 반대론자들은 경제 개방 및 국제화를 위해서는 추가적인 M&A에 대한 규제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EU 같은 국가연합의 경우 경제자유화를 통한 공동체의 상호이익 증진이라는 명분과 자국 중요 산업의 보호를 위한 각국 정부의 조치가 충돌하는 현상은 EU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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