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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과주말을] 그녀의 삶 지탱해준 '390권의 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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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대단한 책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언숙 옮김
마음산책,
680쪽, 2만7000원

지은이가 처음 책에 빠져들었던 이유는 ‘생존’ 때문이었다. 마리는 일본 태생이지만, 불과 9살의 나이에 공산주의자 아버지를 따라 체코 프라하로 이주해 소비에트 학교에 다녔다. 14살 때 일본으로 돌아온 후 대학에서 러시아어와 문학을 전공한 그는 러시아어와 일본어 동시통역사가 된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이 직접 지명해 통역사로 쓸 정도로 재능이 있었지만, 뜻밖에도 언어는 한 때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첫 번 째가 프라하 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 러시아어를 쓰는 소비에트 학교 동급생들과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편두통과 어깨 통증이 심할 정도로 언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생활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비법은 문학작품을 질리도록 읽는 것이었다. 귀국 후 이번에는 모국어 어휘가 모자라 애를 먹었을 때도 역시 구원은 책으로부터 왔다. 그러는 동안 1주일에 4권씩 책을 일소(日蘇)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며 러시아어 감각을 유지했다. 투르게네프와 나쓰메 소세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소녀를 도왔다.

그렇게 시작된 책과의 만남은 평생으로 이어진다. 독서는 생활 그 자체였다. 이 책은 지난 해 난소암으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탐독한 390권에 대한 독서일기다. 잡지에 5년 여간 연재한 글 186편을 모은 것인데, 지은이의 총 독서량에 비하면 390권은 사실 빙산의 일각이다. 다독(多讀)에 속독(速讀)이기까지 한 그는 대학 입시에서 해방되고 나서부터 20여 년간 하루 평균 7권을 읽었다고 한다.

이런 식의 독서일기를 읽는 맛은 특정 책에 대한 나와 지은이의 취향의 일치함과 갈라짐을 확인하는 것. 그런 점에서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일본 책을 다수 포함한 이 책은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사회·문화는 물론 국제정치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식견은 놓치기 아깝다. 특히 책을 세상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도구로 활용하는 지은이의 태도는 무비판적으로 책을 소비하거나, 책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요즘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해 7권째를 낸『장정일의 독서일기』(랜덤하우스)나 마이클 더다의 『오픈 북』(을유문화사)을 흥미롭게 탐독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책의 대단한 힘을 믿는 사람들에게 권한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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