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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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윤리과목 선생님의 별명이 욕쟁이라는 건 어찌보면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 못될지도 모르지만,그래도 욕쟁이가 욕쟁이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욕쟁이 선생님은 아주 다혈질이었고,무언가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난 상황에 맞닥뜨리면 냅다 쌍소리들을 뱉어내기 일쑤였다.우리에게 이 새끼들아 나쁜 년들 어쩌고 하는 건 다반사였고,심할 때는 더 심한 욕도 거침없이 토해내곤 했지만 굳이 그런 욕들까지 망신스럽게 여기에 옮기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도 우리가 욕쟁이를 싫어하지 않는 건 욕쟁이는 화가 났을 때에만 욕을 해댄다는 사실 때문이다.그러니까 욕쟁이가 하는욕들은 그나마 진심에서 우러난 욕들이었다는 말이다.그리고 욕쟁이를 화나게 만드는 일들은 그야말로 화를 낼만한 일들이었던 거였다. 1학년 때 정은이라고 귀엽게 생긴 계집애가 있었다.정은이는 2학기 들어서부터 보이지 않았는데,『러브 스토리』에 나오는 백혈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쫘악 학교에 퍼졌다.백혈병이라는 게 암의 일종이라는 걸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어쨌든 12월 달이었고 함박눈이 펄펄 날리는 오후였는데,코트차림을 하고 누군가 교정을 걸어다녔는데 그게 정은이였다.정은이가 교사 안으로 들어와서 이 교실 저 교실을 기웃거리면서 엉뚱한 짓들을 해대자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 치고는 했다.
정은이의 몰골은 해골처럼 아주 흉칙했고 머리도 많이 빠져서 머리거죽이 드러나 보일 지경이었다고 했다.코트의 앞자락이 열린 사이로는 병원 환자복이 보였는데,정신도 오락가락했다는 거였다.
교무실에서 선생들이 달려오고 딸딸이 아저씨도 뛰어왔지만 아무도 정은이에게 다가서려고 하지 않았다.그때 정은이에게 다가가서머리의 눈도 털어주고 코트의 앞자락도 채워주고,그리고 정은이의어깨를 감싸안으면서 무언가를 같이 말하면서 정 은이를 병원까지데리고 간 사람이 욕쟁이였다.정은이는 그 뒤로 한달도 더 못살고 죽었는데,그 소식을 들은 욕쟁이는 우리에게 아주 심한 욕을해댔었다.그러니 우리가 욕쟁이를 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동준이는 수미와 생활지도부에 끌려갔다가 온 날부터 보름 동안이나 등교하지 않았다.자퇴원서를 냈다는 소문도 있어서 아이들이 집에 알아봤더니,동준의 어머니 말로는 곧 학교에 나갈거라고 하더라고 그랬다.
그러고 있던 즈음의 일요일이었다.
하영이와 둘이 용인의 자연농원에 간 적이 있었다.이것저것 탈것들도 타고 빈대떡도 사먹고,야외 음악당에서 있은 공연을 보면서 박수도 치고 그랬는데,하영이가 밝게 웃어주어서 아주 기분좋은 하루였다.
『동준이와 수미에게 도깨비가 한 말을 어떻게 생각해?』 길 양편으로 꽃밭이 펼쳐진 길을 걸으면서 하영이가 내게 물었다.우리는 한손에 하나씩 아이스크림을 들고 하아먹으면서 걷는 중이었다.조금 있으면 해가 기울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잔인한 짓이었어.』 『걔네들이 잘못한 것도 있었잖아.』 하영이가 말하다 말고 내 옆구리를 콕 찔렀다.사람들 틈으로 동준이와 수미가 떠억 팔장을 끼고 가는 게 보였다.내가 걔네를 부르려고 하는데 하영이가 내 팔을 잡아끌면서 그랬다.
『그냥 놔둬.둘이서만 있는 시간이 더 필요할 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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